“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퍼뜩 든 느낌은
주님 앞에 서는데도 힘이 필요한가 하는 거였습니다.
주님 앞에 서려면 무슨 힘이 있어야 할까요?
감히 주님 앞에 서려면 깡다구가 필요하다는 뜻일까요?
국어사전을 보면 “악착같은 기질이나 힘”이라고
깡다구를 뜻풀이한 것으로 보아 깡다구도 힘이긴 한 모양입니다.
사실 누가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깡다구가 없는 사람은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의 힘은 <영적인 깡다구>입니다.
제가 아주 감탄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의 학살을 자행하고도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뻔뻔할 수 있으며,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고도 잘못이 없다고
국민들과 수많은 사진 기자 앞에서 꼿꼿이 머리를 쳐들 수 있는,
그 대단한 깡다구입니다.
<영적인 깡다구>는 물론 이런 깡다구가 아니겠지요.
주님 앞에 서면 “도둑이 제 발 저리듯”하고
이사야가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듯
더럽고 죄인임에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갈 지경인데
어떻게 감히 꼿꼿이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영적인 깡다구>는 이런 뻔뻔한 깡다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 깡다구입니다.
옛날 제가 청원장을 할 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청원자들은 야단을 맞고 지적을 받으면
저를 살살 피하고 제 곁에 잘 오려하지 않는데
그 형제는 야단을 맞아도 계속 아니 더 제게 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사랑을 믿기 때문이었는데
저의 사랑을 믿어주는 그 형제가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고,
저를 믿기에 저도 그 형제를 믿고 더 야단을 칠 수 있었습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 인간의 사랑은 우리 죄로 가릴 수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죄로 가릴 수 없다고 믿어야 참 믿음이겠지요.
그러니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 믿음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 앞에서 설 수 있게 하는 이 믿음의 힘은
깨어 기도함으로 지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는 보통 믿기에 기도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면 아무 기도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믿기에 기도하기도 하지만
기도함으로써 믿음의 힘을 지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비를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이기도 하지만
내려주시는 그 비를 맞아 자라는 우리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죄인이어도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사랑을 주십사고 감히 청하는 청원기도도 우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 믿음이 자라고 튼튼해지는 성장의 기도도 우리는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 사랑을 받을수록 그리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수록 우리의 믿음은 성장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뻔뻔하게도 주님 앞에 서고
기도하기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얻게도 됩니다.
주님앞에 매일매일 마지막 한달
더욱 주님의힘으로 살기를 청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