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기와를 벗겨 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오늘 복음은 스스로 주님께 올 수 없는 중풍 병자를
남자들 몇이 주님께 데리고 감으로써 치유 받는 얘깁니다.
이 대림절은 스스로 하느님께로 갈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시기인데
오늘 얘기는 반대로 어느 집에 계신 주님을 중풍 병자가 찾아 가고,
자기 스스로 갈 수 없기에 도움을 받아 찾아 가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얘기가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기에
찾아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주님의 열정은 찾아가는 우리의 열정을 훨씬 능가합니다.
주님께서는 아쉬운 놈이 찾아오라고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아쉬운 사람이 찾는 거라고 생각하면 이미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쉬운 사람이 찾아오기를 바라시지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저 하늘에서 이 땅을 찾아오셨고, 이 마을을 찾아오셨고,
이 마을 어느 집에 머무시며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열정이라면
그 집까지 찾아가는 것은 우리의 열정이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맞이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맞이하러 간절곶을 가고, 정동진까지 가듯.
<마중 열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달마중하러 뒷동산 올라가듯.
오늘 중풍 병자와 협력자들은 이 열정을 보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이런 열정을 보인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특히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협력자들이 보인 열정은 드물고 칭찬받을만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열성(정)을 보고 치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 치유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 보내는 것이
어찌 열성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주님께서는 보실까요?
저 같으면 열성을 보고 고쳐줄 텐데 믿음을 보고 고쳐주십니까?
이들의 열성은 인간적인 열성이 아닙니다.
이들의 열성의 뿌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고,
이들의 믿음의 뿌리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믿음은 자식의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뭔 짓인들 할 것입니다.
열성이 아니라 극성이라고 사람들이 지청구를 늘어놓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