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는 예루살렘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는
우리 교회가 순교라고 포장을 하지만 가혹하고 잔혹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는 그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만 하는가?
그런 하느님의 처사가 옳다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런 처사를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이 죽임당한 사건이
옳은 일일 뿐 아니라 사랑이기 위해서는 다음의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어떠한 죽음이든 죽음은 모두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죽음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죽음이 불행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것이 행운이고 행복이 아니라
행복해야지 살아있는 것이 행운이고 축복이지
불행하면 살아있는 것이 결코 행운도 축복도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찍 죽으면 불행한 죽음이라는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하면 행복한 삶을 오래 살다 죽어야
행복한 죽음이고 그런 죽음을 호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준을 천국 행복에의 참여라고 하면
사실 일찍, 빨리 참여할수록 좋은 거지요.
죄 없는 사람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도 죄 있는 사람도 다 죽는 것입니다.
죄 있는 사람만 벌을 받아 죽는 거, 그것도 일찍 죽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예수님을 위해 죽임 당한 것은
죽음이 죄의 벌만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증거 하는 것이며,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의 예표입니다.
그러니까 죄 없으신 당신 아들을 우릴 위해 죽게 하신 하느님께서
죄 없는 아기들을 당신 아들을 위해 죽게 하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지 말고
사랑 때문에 죽으라는 하느님의 큰 뜻이
오늘 우리가 지내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예수님의 탄생하심 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어져야하는
많은 것들 그것이 하느님사랑이심을 깨달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