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를 생각하는 사순 시기인데 올해는 이 사순 시기의 회개를
생태적 회심 차원에서 성찰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작년 5월 생태적 회심을 위한 7년 여정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맞는 사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순 제1주일은 주님께서 유혹받으시는 얘기인데
이 유혹 얘기도 생태적 회심 차원에서 성찰하면 좋을 것입니다.
회개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태적인 회심은 반 생태적으로 지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고,
이제부터 하느님 뜻대로 생태적인 삶을 사는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반 생태적인 죄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우리 인간에게 주신 피조물들
곧 생명들을 파괴한 죄입니다.
그 첫 번째 파괴이자 대표적인 파괴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지만
그것으로 생태계가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서로간의 파괴요 죄이지 생태계에까지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생태계가 무지막지하게 파괴된 것은 언제부터이고 무엇에 의해서입니까?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다음이고 자본주의의 체제와 문화에 의해서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생태계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살아갔는데
그 이후부터 인간이 생명들 위에 군림하면서 생태계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태계를 파괴하는 이런 죄는 인간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중에 생태계가 이렇게 파괴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었듯이
인간의 욕심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더 풍요롭고, 더 편리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이런 결과의 원인이며, 산업화와 기술, 테크노놀로지는
대량생산과 과잉생산을 가능케 하였고, 자본주의가 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정신을 타락시키고 소비주의 문화를 조성한 것입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출현 이전에는 필요한 만큼 생산하였는데 산업화와 기술로
대량 생산과 과잉 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기술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 곧
자본가들이 기업의 이윤을 위해 소유와 소비를 조장하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케인즈 학파가 대표적인데
그 중 한 명인 폴 사무엘슨은 행복=소유/욕망라는 정식을 통하여
소유와 소비를 조장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후 견제 세력이 없어진 자본주의는 더욱 악마적으로
자본을 소유하고 운영하며 정신과 문화를 소비주의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소비가 미덕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우리가 문제 의식 없이 쓰고,
소비 심리가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성 없이 쓰는 것이 다 이런 현상입니다.
이들은 욕망은 죄가 아니라고 계속 얘기하고 광고를 통해 계속 쇠뇌합니다.
더 좋은 것, 새로운 것을 갖고 싶어하게 하고, 가지라고 하고, 누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유혹자, 마귀, 곧 반 생태적인 유혹자, 반 생태적인 마귀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항상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하고, 본 것이 좋아보이게 하며,
탐스러워 보이게 합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나쁘게 보이면 누가 사고, 탐스럽지 않으면 누가 소유하겠습니까?
항상 좋아보이고 탐스러운 것을 보라고 하며,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탐욕이
아니라고, 죄가 아니라고 인간의 소유욕과 탐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아예 보지 말아야 하고 대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처럼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얘기하면 하늘을 보고, 계속 유혹을 해대면 꺼지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명심할 것은 성령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시고
곧바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어 유혹자와 대결하십니다.
우리도 소비주의의 정신과 문화에 성령으로 정신 무장하고 대결해야 합니다.
가난 정신과 우주적 형제애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대결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