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리라.”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민족들을 초대하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산 위에서 차리고
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초대하신다는 얘기인데
복음에서는 이 잔치에 먼저 정중히 초대받은 사람은 오지 않아 벌을 받고
길거리에서 불러온 뜨내기는 예복을 입지 않아 벌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와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있는데 누가 이 잔치에 응하고 누가 거절할까?
이런 상상을 하다 보니 또 제가 자주 하는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천당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드시라고 하면 모두 손을 드는데
지금 당장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을 드시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때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 젊은이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중
누가 손을 들고 누가 선뜻 손을 들겠습니까?
젊은이일까요?
늙은이일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과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을 보면
초대에 거절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방금 장가들어서 갈 수 없다고 하는데
지금 자기 연애 사업이 한창인 젊은이가 남의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취직해야 하고 그래서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데
이미 취직하고 결혼도 하는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자기는 취직 못해서 결혼도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이미 화가 나 있는데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오라고 하면 더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남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화가 나는 젊은이는
늙은이보다 하늘나라의 임금님 아들 결혼 잔치에는 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이런 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젊은이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초대받은 늙은이가 관심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초대가 아직도 달갑지 않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들 걱정도 좀 더 하고,
손주도 좀 더 봐줘야 하고,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으니
더 일해야 하고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문제지만 초대에 응하려고 해도 준비가 안 된 경우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초대받고 얼떨결에 거절하지 못하고 가긴 갔는데,
혼인 잔치에 갈 예복이 준비되지 않아 그냥 간 경우입니다.
부조금은 없더라도 예복은 걸치고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늘나라 혼인 잔치의 예복입니까?
돈입니까?
공로입니까?
이 세상 업적입니까?
제 생각에 마음입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관심이란 무엇에 관한 마음인데
하늘나라에 관한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감사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서 사랑과 갈망입니다.
하느님을 늘 사랑하고 하늘나라를 늘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