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신적인 능력이 드러나는 것으로
표징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믿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표징을 요구하는 마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해보려는 마음입니다.
복음 환호송에서 만나는 시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시험했습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해도
광야에서 물을 주실 수 있고
먹을 것을 주실 수 있겠냐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스스로 증명하셔야 했습니다.
증명이 되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믿음과 증명이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증명을 거부한다면
맹목적인 믿음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증명된 것만 믿는다는 것은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느님도
내 이성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만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하느님을 내가 좌지우지하고 싶은
내가 하느님보다 위에 있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부하고 싶은
합리적 이유를 찾는 행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성적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신앙과 이성이 함께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이성이 없는 맹목적인 신앙도
신앙이 없는 차가운 이성도
우리 삶에 좋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는
쉽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둘이 연결되지 않고
따로따로 있는 것 같아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둘의 조화만이
우리를 올바른 신앙과 올바른 이성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 방법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조화에서 오는 어려움도
그리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