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가?
그전에 무엇이 더러운 것인가?
제 생각에 더러움이란 죄의 더러움일 것입니다.
이력서로 치면 이력서에 범죄의 이력으로
이력서가 깨끗하지 않고 지저분한 거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이나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입니까?
음식과 관련한 조상들의 전통과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지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 밖의 먼지나 오물이 우리의 손이나 발을 더럽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안까지 더럽게 하거나 마음이나 존재를 더럽힐 수는 없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나 바오로 사도 모두 욕망 또는 탐욕을,
사람을 더럽히고 죄짓게 하는 것의 하나로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제 생각에 욕망은 욕구와 욕심 사이의 징검다리입니다.
욕구는 인간의 본능과 같아서 욕구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식욕이 있는 것이 어찌 죄이겠습니까?
성욕이 있는 것을 어찌 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고 먹고살도록
또는 후손을 잇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도 악이 아닙니다.
돼지와 돼지고기가 무슨 악이고 죄짓게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다 선이 아닙니까?
좋은 것들이기에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죄의 씨앗이고,
욕망이 욕심과 탐욕으로 발전하여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한 것이 죄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개탄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문화가 이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긴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 대신 욕망이 자리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시며
오늘 바오로 사도와 주님 말씀처럼 복음이 그리고 사랑이
이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하시고,
그러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속에 담긴 것, 그것이 뭡니까?
욕망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 욕망을 정화하게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