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다시피 오늘 복음의 얘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입니다.
제 생각에 루카 복음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똑같은 은총을 받았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방인보다 하느님께 더 감사드리지 않음을 꼬집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이 이방인보다 감사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를 더 잘 드려야겠지요.
그런데도 감사를 오히려 더 드리지 않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감사드리지 않음은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고,
감사하지 않음은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식과 남이 똑같이 받았다면
그 사랑이 자식에게는 당연하고 남에겐 특별하겠지요.
나병 환자들이 같이 치유 받고 이방인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드리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을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은 하느님의 선민이고 아들이니
하느님 치유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데 비해 이방인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았기에 그것은 특별한 선물이고 은총이고 그래서 감사드린 것이겠지요.
은총이란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은총이 아니고 특별할 때 은총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이런 이유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어떤 환자가 돈 주고 의사에게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자는 돈이 없어서 공짜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경우 돈 주고 치유 받은 사람은 그 치유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공짜로 치유 받은 사람은 무상의 은총이 되게 되겠지요.
차로 말하면 유상 수리가 아니라 무상 수리입니다.
이때 돈 주고 치유 받은 사람은 의사에게 불평할 것입니다.
왜 치유가 친절하지 않으냐?
왜 나에게는 돈 받고 그에게는 공짜냐?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도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의사가 치유해준 것쯤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자신에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다고 한탄하시지 않고,
하느님께 영광 드리러 오지 않았다고 한탄하시지 않습니까?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그래서 오늘 우리도 반성합니다.
우리는 병을 치유 받고 많은 경우 의사가 치유해줬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셨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은총이 당연하고 그래서 은총이 아닌 사람은 불행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