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오늘 주님께서는 산 위에다가 자리를 잡으셨을까요?
많은 사람이 당신께 오게 하려면 특히 장애인들도 당신께 오게 하려면
평지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이 이 세상까지 오신 주님다운 사랑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창세기 2장에 의하면 반대로 하느님은 굳이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당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구원도 저 높은 하늘에서 말씀 한마디로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시지만
굳이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구원하시고자 하셨는데
이것이 육화의 구원이고 육화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에까지 내려오신 분이 어찌 오늘은
사람들이 오기 힘든 산 위에다 자리를 잡으시고 치유하시는 겁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에,
뜻이 없다거나 사랑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인이라면 이렇게 하신 것에,
주님의 뜻이 있고 사랑의 의도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이고, 사랑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신앙인이라면 산이란 하느님의 산을 말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니 산에 자리 잡으신 것은, 하느님 계신 곳에 초대하려 하심이고,
이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초대는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 길을 통과하고,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본래 열망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평지나 걸으려는 것은 열망이 없는 것이고,
어려움이 클수록 그리고 큰 어려움을 무릅쓸수록 열망이 큽니다.
하느님 계신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최고의 열망이 필요합니다.
최고란 가장 높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최고로 높으신 하느님께 가려면,
최고로 높은 산에 계신 하느님께 가려면 최고의 열망이 필요합니다.
옛날 유럽의 많은 성당은 언덕배기에 세워졌고
수많은 계단을 오르게끔 설계가 되어 있는데
걸어 올라가도 힘든 그 계단을 신심이 큰 사람은 무릎으로 기어 올라갑니다.
아무튼 마태오복음은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루카 복음과 달리 산 위에서 ‘행복 선언’과 소위 산상수훈이란 것을 하셨다 하고,
오늘 병자를 치유하시고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곳도 굳이 산 위에서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왜 호숫가로 가셨다가 굳이 산에 오르십니까?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가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일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