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보면 실천 불가능한 권고를 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어떻게 언제나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실제를 보면 어쩌다 한번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도 ‘언제나’가 아니라 ‘어쩌다’ 한 번입니다.
기쁨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누구 덕분에 이루어졌을 때 감사하게 되는 것인데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드물 뿐 아니라 누구 덕에 이루어지는 것보다
누구 땜에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으니 기쁠 일은 적고 감사할 일은 더 적지요.
그러니 그것이 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기쁨과 감사 사이에 기도를 껴 넣고
기도하는 사람만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서를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 밖에선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순 없다는 밀이 되지요.
그러나 이 말도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지만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다 이루어주셔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일치하지 않으면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약을 달라는 우리에게 절대 마약을 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잖습니까?
그리고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달걀보다 훨씬 더 좋은 성령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 대로
안 주실 것은 아예 청하지 말고 주실 것을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주시고,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청을 다 들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애인과 있으면 그 자체로 기쁘고 즐거운 것처럼
하느님 안에 있으면 그 자체로 언제나 기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하느님 그분 자신이지 그분이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리고 보석을 바라고 애인을 만난다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내 바라는 것과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주님을 만나면 참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다리고 만나고
그래서 언제나 기쁘고 늘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