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까?”
세례자 요한의 특별한 탄생을 지켜보며 친척들은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아이의 운명이 하느님 손에 있음을 부모들은 알기에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으려고 하지만
친척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자기 관습대로 지으려 하고,
아이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요한의 특별한 탄생과 운명을 보면서
요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묵상합니다.
우리의 탄생과 운명도 실은 같은 것이라는 묵상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부모의 뜻에 의해 시작된 것 같지만,
실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우리의 탄생이 부모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불신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시작이 이러하니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운명이 전부 다는 아니어도 많은 것이 탄생 때 이미 결정된 거라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다른 부모가 아니라 제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제 아버지의 결정이나 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의 태어난 날이나 혈액형이나 성향이나 이런 것들도 다 저의 결정이 아니고,
그렇다고 제 부모 뜻대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향적인 자기 성격이 싫어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꾸려 하고,
부모도 자기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자기 입맛에 맞게 키우려고 했지만
내 뜻대로도 부모 입맛대로도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내 뜻이나 부모의 뜻과 다르게
나의 인생이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주어진 운명이라고 느끼지요.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것이 하느님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도 그 존재가
하느님 뜻과 사랑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렇기에 우리의 운명도 어느 정도 하느님 뜻대로 정해졌는데
그것이 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순종이요 순응이겠습니다.
즈카르야는 처음 하느님의 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였고,
그래서 의심을 퍼트리는 말문이 막혔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게 되고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짓자 말문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의심의 말문은 막히고 찬미의 말문은 열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