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출산을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라고 생각합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자신들의 아기에게 할례를 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기의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는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복음 사가는 이 일을
주님의 손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의 탄생과 세례는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손길이라고 표현됩니다.
그에게서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주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즉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요한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의 탄생에서부터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죽을 때까지
세상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이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요한은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버리시고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이
그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누군가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단지 우리에게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쉽지 않은 순간에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비록 그 경험이 강하지는 않아도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고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하느님께서 정말 계시며
그것도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
삶의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그것을 전해 들은 사람들에게도
삶의 희망으로 다가갑니다.
그렇게 희망이 퍼져 나가고
희망에서 오는 기쁨도 퍼져 나갑니다.
요한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더 큰 희망, 더 큰 기쁨을
누릴 준비를 시켜 주십니다.
그를 보면서 작은 희망을 보고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앞으로 주시려는
더 큰 희망, 더 큰 기쁨을 기대할 수 있고
그 기대를 통해 우리도
누군가의 희망,
누군가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