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14장으로
수난기가 시작되기 전 부분입니다.
그래서 '가신다'는 말씀이
수난을 통해서 제자들 곁을 떠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화를 언급하시는 것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과 연결한다면
예수님의 '가신다'는 말씀은
아버지 곁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가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는 말씀이
이해됩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신 다음에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분명 다릅니다.
세상은 시끄러운 일을 잠재우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죽음이 아닌 부활,
즉 생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도
부활이 가져온 평화도
죽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다릅니다.
세상이 원하는 평화는
나의 죽음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나를 위해서 네가 희생되어야 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자발적인 죽음입니다.
너를 위해서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다는 말로
우리는 서로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물론 공동체가 움직이기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강요가 아닌 자발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 희생을 알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희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감사함으로 표현됩니다.
감사함을 잊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은
강요만큼이나 좋지 않은 방식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움직임은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사랑의 결과인 것처럼
우리의 움직임도 사랑의 결과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서로의 노력은
기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평화와 기쁨이 함께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