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고 우리 마음도 모르시기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랑 고백을 듣고 싶으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자주 확인하고 싶고,
그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꼭 귀로 듣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뜻에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 능력과 한계까지 다 알고 계시기에
지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모든 질문은 당신을 위해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질문은 베드로를 위해서 던지시는 질문이고,
우리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사랑 성찰을 하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사랑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랑 성찰이란 어찌 보면 사랑 점검인데 이 점검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새 실종되거나 방향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실종되고 없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더라도 내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한지 성찰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사랑 고백 기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재(再)고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고백을 듣기 원하심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사랑 고백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랑을 원하지 않고 사랑 고백도 듣기 싫어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내가 사랑한다고 쫓아다니고 계속 사랑 고백을 하면
그에게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 고백은 스토커의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부족한 우리 사랑을,
수없이 배반한 우리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십니다.
셋째로 이 질문은 사랑 다지기입니다.
더 사랑해야지,
다시 사랑해야지 거듭 마음을 다지게 하는 것이고,
사랑의 의지를 갱신하고 거듭 쇄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질문을 왜 또 하시냐고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 추궁이라면 짜증 나고 짜증 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성찰, 사랑 고백, 사랑 다지기의 기회를 주심이라면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이고 그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처럼 당신 양 떼를 우리에게 맡기실 때
그 양 떼를 우리도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