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는 많이 읽히지도 않고 짧은 서간인데
잘 뜯어보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선 내적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얘기해줍니다.
내적 생활이란 이웃 사랑과 관련한 외적인 생활과 다른 생활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기 전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내적으로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행복해야겠지요.
내적 생활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이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기도라는 것에 이의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다 서간은 기도하라고 하는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는 기도도 있다는 것인가요?
그런 기도는 없고 또 없어야 하지만
기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악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 그러니까 저 웬수 벼락 맞아 죽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기도만 하는,
그런 사람은 있을 것이고 많을지도 모릅니다.
프란치스코의 말로 바꾸면 기도의 영이 아니라 육의 영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다 서간은 이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영원한 생명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가 나를 구원하시도록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바르티메오처럼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구원을 위한 내적 생활을 잘하라고 권고한 다음
유다의 서간은 이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권고합니다.
내적 생활에 이어 외적 생활에 대한 지침을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내적 생활에 관해 얘기했는데
성령 안에서 기도했다면 이제 그것이 외적 생활로 드러날 것입니다.
곧 기도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복음의 기쁨> 2번은 이렇게 진단하며 경고합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오늘 유다 서간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어떤 이들에게는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여기서 의심하는 이들은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이들을 멸망의 불에서 구하기 위해 자비를 베풀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유다 서간은 재미있게도 속옷까지 미워할 사람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속옷까지 미워할 어떤 이들이란 이단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이단들도 물들까 두려워하면서도 자비의 대상이니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것은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로 종합이 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기로 맘먹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