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권한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부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면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들은 지금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기에
스스로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위도
하늘이 아닌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즉 예수님의 권한을 질문한 것도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이유라기보다는
그 방식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만큼
옆 사람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각자는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에 충실할 때
서로 높낮이가 없이 함께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러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낮추면서
내가 올라가고 내가 드러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무시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 상황에서 그와 싸워서 이기거나
무시를 견디는 방법 밖에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나를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힘의 논리로 상대방을 누르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도 드러나고 너도 드러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