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
비유란 것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고 저렇게도 이해할 수 있어서,
그것이 묘미이기도 하지만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비유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참으로 어렵습니다.
준비성의 유무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을 가른다는 말씀인지,
상황파악을 잘하고 못하고에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이 갈린다는 것인지,
자기직분에 대한 인식에 따라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이 갈린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고 그래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렇습니다.
등은 준비했는데 기름을 준비치 않음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가 총은 있는데 총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준비성의 부족은 어리석다 못해 어의가 없을 정도입니다.
상황파악을 잘못하는 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듯 지금 상황이 깨어있어야 하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 잠을 자고 있다면 정말 상황파악을 잘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자기직분이 혼인잔치의 들러리인지 손님인지 분간을 못하여
마치 손님인양 마시고 놀다가 잠이 들었다면
이것 또한 자기직분을 망각한 대단한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비유를 인격적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준비성이나 상황파악이나 직분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성향이나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라는 얘기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오늘 비유와 관련하여 바꾼다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혼인잔치의 들러리들에게 있어서는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성실한 사람이 더 슬기롭고,
성실한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슬기롭다고.
자기의 일의 성공과 승리의 문제라면
진정 능력과 노력보다는 즐기는 것이 더 낫다는 식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주님과의 만남은 능력의 문제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며
그렇다고 즐김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으로 만남을 잘 준비하고
사랑으로 직분에 충실할 뿐 아니라
사랑하기에 깨어 기다리는 것이 기쁘고
사랑하기에 늦게까지 기다리는 것이 즐거우며
사랑이 살며시 와도 사랑하기에 즉시 알아채고 맞이합니다.
사랑을 하는데 어떻게 기다리지 않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놓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