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오르려 할까요?
자신이 낮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르려 할 것입니다.
낮은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르려 할 것이고
낮은 곳에 있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르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르려 하는 사람은 자신의 낮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고
낮아서 불행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르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낮음을 더욱 느끼게 되고
그래서 오르려 하면 할수록 비참해집니다.
그에 비해 실제로 높은 곳에 이미 오른 사람은 이제 내려옵니다.
산꼭대기를 오른 사람이 해야 할 것은 하산뿐이듯 낮은 곳으로 내려옵니다.
왜냐하면 꼭대기를 오른 사람은 알기 때문입니다.
꼭대기는 사람이 계속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꼭대기를 처음 올랐을 때는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고
세상이 다 내 것만 같아서 좋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됩니다.
꼭대기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기에 너무 외로운 곳이라는 것을.
그래서 꼭대기를 올랐던 사람은 낮은 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압니다.
높은 곳에 외롭게 있는 것보다
낮은 곳에서 부대끼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압니다.
저는 저희 수도회에서 관구장이라는 최고 책임을 6년간 맡았습니다.
교구로 치면 교구장 주교님과 같은 역할과 책임을 맡았지요.
제가 어린 나이에 관구장이 되니 많은 사람들이 일찍 출세했다고
세속적인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 신부님께서는
소식을 듣고는 장례식 때 보내는 Condolence,
즉 애도를 표한다는 카드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보내셨습니다.
실제로 관구장이 되고 나니 사람들이 어려워서 가까이 오지 않고
문제가 있을 때만 의논하기 위해 찾아오는 매우 고독한 자리였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지만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으로도 불행해지는 지름길입니다.
고독하게 중요한 결단을 수없이 내려야 하고
그 책임을 져야하는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지요.
그런 책임을 놓고 나니 너무나 홀가분하고 행복했습니다.
어딜 가도 늘 공식적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처신 해야만 했는데
이제는 마음에 있는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신자들을 만나 맘 편히 해장국도 같이 먹을 수 있는 평범함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을
살갗을 맞대며 함께 나누는 사랑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어떤 커다란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도 사랑을 나누는 것이
더 좋고 행복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더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살을 부대끼며 인간적인 사랑을 나누는 행복도 크지만
주님의 총애를 받는 더 큰 행복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오늘의 1독서 집회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주님께서는 낮추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箬水라 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물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은 흘러내리고 그래서 제일 낮은 곳에 고입니다.
꼭대기는 물을 흘려버리고 낮은 골짜기에는 물이 고이는 법이지요.
그래서인지 순 우리말에 사랑을 받는다는 뜻의 굄을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낮추어 처신하는 사람에게 내리사랑이 고이는 것을 내포하는 것일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의 속성은 낮추는 것이고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난체하고 시건방지면 사랑이 전혀 가지 않고 오히려 치고 싶고
겸손하면 저절로 사랑이 가고 마음으로부터 그를 높여주게 됩니다.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마리아께서 이 몸은 주님의 종이라고 자신을 낮추시니
하느님은 마리아를 당신의 어머니로 높이십니다.
이에 대해 성모님은 교만하고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다고 하느님을 찬미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