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의 메시아 신앙 고백과
주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바꿔 얘기하시며
고통과 죽음을 당한 다음 부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공동번역은 여기에 <반드시>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반드시 죽어야 하고,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죽지 않으면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아니고
부활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죽지 않으면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씀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고 우리의 바람도 저버립니다.
보통의 우리는 그리스도는 고통과 죽음과 관계없을 거라 생각하고
그리스도라면 그런 존재이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우리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고통과 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바람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신성의 측면에서만 얘기한다면 고통과 죽음을 모르심이 맞고,
사랑이 없는 하느님이라면 고통과 죽음을 모르심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더욱이 인성을 취해 오시는 그리스도라면
고통과 죽음을 모르셔서는 안 되고, 모른 체 하실 수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하자
그 말을 바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이 될 운명이고,
사람의 아들이 된 그리스도는 고통과 죽음을 반드시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된 그리스도는 또한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
부활치 않는다면 사람의 아들일 뿐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을
신성의 당연한 구현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이 역시 사랑의 뜻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음을 모르는 하느님이 죽을 운명의 인성을 취하신 것만 사랑이 아니고
죽음에 처해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도 사랑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육화와 수난만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
부활도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라는 애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성을 드러내신 사건 정도로,
다시 말해 하느님이시라면 부활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부활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는 부활일뿐이라면
이런 부활은 사랑이 없는 그래서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메마른 부활이고,
인간이 되신 애초의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린 신성의 과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는 것은
당신의 신성의 구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자식을 위해서 죽지 말아야 할 부모와 같습니다.
어린 자식을 둔 부모는 중병에 걸려도 자식을 위해서 죽지 말아야 하고,
자식을 위해서 반드시 살아나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야 합니다.
사랑은 수난과 부활을 공유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이 그리스도성(性)의 신비를 우리도 살아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