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시는 주님께 어떤 사람이 느닷없이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우리는 가끔 길을 가다가 “구원 받으셨습니까?”하고 질문을 받지요.
그때도 그 느닷없음에 당황하곤 하였지요.
구원에 대한 질문이 많은 사람에게 느닷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느닷없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구원과 동떨어져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과 행복은 동의어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행복하냐는 질문도 느닷없기는 합니다.
행복하냐고 질문을 받으면 많은 사람이 당황하잖습니까?
그저 사느라 행복 문제를 내려놓고 산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살면서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알게 모르게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행복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내려놓고 살았기에
아니, 진지하게 올려놓고 고민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자기의 삶이 진정 행복한지도 모르고,
구원에로 제대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삶을 우리가 진솔하게 반성할 때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결코 느닷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의 행복을 고민해온 구도자이고,
그 행복이 하느님의 구원으로 주어짐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선지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십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 사람이 많다 적다로 답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라.”고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구원 받을 사람은 144,000명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하느님의 품이 그렇게 좁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으로 치면 정원이 몇 명 되지 않기에
그 좁은 입시의 문을 통과하려면 무진 애를 써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 품이 그리 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하늘에는 있을 곳이 많습니다.
태어난 사람의 숫자만큼 많고 그 이상으로 많습니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자기 천국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상 여정을 하는 동안 이 천국을 내려놓고,
아니 잃어버리고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행복의 문제를 내려놓고 살아왔고,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오늘 복음의 질문자처럼 구원의 문제를 고민했다면
주님께 찾아왔을 거고 주님의 구원을 받았을 텐데
고민하지도 않고 주님께 찾아오지도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이 좁거나 문턱이 높은 게 아니라
애초에 문까지 오지도 않고 문턱을 넘으려고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의 질문자가 부럽고 그래서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오늘 복음의 그 질문자처럼 구도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먹고 사는 문제에 행복 문제를 놓친 사람인지,
주님을 찾는 사람인지 세상을 쫓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