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 인사말로 마리아에게 다가갑니다.
'기뻐하여라.'
천사가 찾아와서 한 첫 마디 말은 '기뻐하여라' 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기뻐하라는 말에 마리아는 놀랐다고 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천사는 마리아가 앞으로 은총을 가득히 받을 것을 이야기 하지 않고, 이미 은총을 가득히 받은 살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드디어 여기에서 천사는 앞의 말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은총을 가득히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있음.
수도자로서 저는 정결을 서약했습니다. 정결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결혼하지 않음, 배우자가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수도자가 정결을 서약함에 있어서, '함께 있음'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삶을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함께 있음'을 더 원하기 때문에 정결을 약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있음'이 주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서로의 부족함을 서로 채워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고귀한 것은, 성경이 이야기 하듯,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결혼 생활일 것입니다. 사랑으로 나를 너에게 줄 수 있고, 사랑으로 너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있음'은 '하나가 됨'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저는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있음'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수도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써 느끼는 부족함, 그 전부를 다른 사람이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부족함에서 오는 고통, 그리고 죽음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한계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 그 한계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을 믿을 때, 우리는 고통 받지 않아야 하고, 죽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어도, 우리는 고통 받고, 결국에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일까요?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너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사람이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은총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고, 고통 중에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죽음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시고,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나와 함께 죽음의 골짜기를 걷고 계십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듯, 그렇게 나와 하느님은 하나가 됩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나와 하나가 돼서 내 안에서 함께 살아가십니다.
사랑이 서로의 어려움에 대해서 고민하고 도와주듯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급기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신이신 그분이 나의 고통의 순간에, 나의 죽음의 순간에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나와 함께 신음하고 계십니다. 그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는 위로로 고통 속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다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우리에게 더 큰 힘으로 다가올 것이고, 그것은 은총의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우리는 웃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사랑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서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기뻐하고, 기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