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에는 7개 성사가 있습니다. 그 중에 세례 성사를 가리켜 입문 성사라고 부르곤 합니다. 세례 성사를 받은 사람만이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사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는 것이라면, 세례 성사는 그 은총을 받기 위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성당에 가 보면 청소년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어렸을 때 원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었고,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서 성당에 다니긴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선택할 나이가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강요에 의해서 성당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단순한 사춘기적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세례 성사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라는 것을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성인 세례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은 반면, 세례 후에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례 성사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니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되지 않고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있을 것입니다. 왕의 자녀, 부유한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 우리는 부러움을 갖지만, 하느님의 자녀에 대해서 부러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이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왕이 누구인지, 부유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부유하다면, 그 아들은 아버지보다는 못 하더라도 그래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더 부유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부유함에 빗대어 아들의 부유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떄,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른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 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내시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우리는 죄를 짓게 되고, 그 죄를 통해서 점점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 들어 갑니다. 욕심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기 보다는, 하나를 더 갖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병으로 고통 받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에서 우리는 악을 경험하고 고통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그런 우리에게 빛을 보내시어, 그 밝음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죽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은, 빛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뜻하고, 그 빛이 우리와 함께 있음은, 우리가 고통의 길을 걷더라도 그 길에서 좌절해서 주저앉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빛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고, 희망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이지만, 예수님 또한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함께 하셨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영광 속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 자매님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형제, 자매님들,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는 어떤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성탄 축제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 한다는 의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