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있지요.
과거 모 대통령 시절, 모 사람들이 역차별을 불평하였습니다.
자기 출신의 대통령이 나왔으니 이제는 지역발전이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히려 다른 지역을 더 발전시키고 자기지역은 그대로였다는 얘기인데,
실제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제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어렸을 때의 저의 경험을 미루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에서 사촌들이 오면
먹을 것이 귀하던 그 때 먹을 것이 생기면 어머니께서
사촌들에게는 먹으라고 주고 저는 양보하고 참으라고 하셨지요.
그때는 어머니가 야속했는데 그것이 맞는 것임을 이제는 이해하지요.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오늘 주님의 처사가
역차별이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오늘 말씀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겠다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의인을 부르시고, 죄인을 안 부르실 것 같은데,
의인을 오히려 배제하시겠다는 그런 말씀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은 역차별도 아니고, 차별도 아닙니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한 번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누군 부르고 누군 안 부르신 게 아닙니다.
왜냐면 죄인을 부르러오셨다고 하시는데 죄인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죄인이지요.
다만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과
죄인이 아니고 오히려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교만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병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병이 있는데도 자기는 건강하다고 뻗대는 것과 같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병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의사를 필요로 하고 의사를 찾아가지만
병이 없다고 뻗대는 사람은 의사가 필요치 않고 의사를 찾지도 않겠지요.
그러니까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죄인은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기에 주님께서 부르셔도 따라가지 않는 자입니다.
그에 비해서 죄인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죄인은 구원이 필요하고
구원자 주님이 부르실 때 오늘 복음의 레위처럼 즉시 따라 갑니다.
그러니 누가 실제로 의인이고 누가 실제로 악인입니까?
차별 없이 부르시는데도
죄 없다고 자처하며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 죄인이고
죄인도 부르시는 주님 사랑에 감읍하여 따라가는 사람이 의인이지요.
이와 같은 것을 복음의 다른 구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그 햇빛이 싫어 빛에로 나오지 않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고,
그 햇빛이 너무 좋고 고마워 빛 가운데로 나오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왜 누구는 빛이 싫고 왜 누구는 빛이 좋습니까?
죄의 더러움을 숨기려는 사람은 빛이 싫을 것이고,
죄의 더러움을 씻으려는 사람은 빛이 고맙겠지요.
나는 부르시는 주님을 따라나서는 겸손한 죄인인가,
부르시는 주님이 필요 없다며 My way를 고집하는 교만한 죄인인가?
이것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