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단식하고 있는가?”를 자문해봤습니다.
저는 단식을 안 하고 있습니다.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주 단식을 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긴 단식은 못해도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이틀 단식을 했었는데
지금 거의 못하고 한 끼 정도 단식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런데 제가 단식을 못한다고 했는데,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가 중요할 거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 한 끼라도 안 먹으면 어질어질해서 못하는 거라면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단식을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물리적인 단식으로 치면 저는 한 끼 정도 단식할 수 있는 수준이니
한 끼라도 단식한다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저의 자기 합리화라는 느낌이 짙게 있습니다.
왜 이런 느낌이 있을까요?
할 수 있는 한 단식하려는 자세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 텐데
저는 할 수 있는 한 단식 하려는 자세가 현저히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단식에는 세 가지 차원,
곧 물리적인 단식, 욕구의 단식, 인격적인 단식이 있는데
세 가지 차원 모두에서 저는 단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선 하루 한 끼라도 단식할 수 있다면 매일 그렇게 단식을 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저는 매일 한 끼 단식을 하지 않고 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한 끼 단식 안 하는 것을 용서해준다 하더라도
단식하는 것이 밥 한 끼 안 먹는 것이 단식의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욕구 만족하는 것을 끊는 게 목적이라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욕구를 끊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지요.
더 나아가, 밥 한 끼가 아니라 욕구를 끊으려고 했다 할지라도
단식의 진정한 목적이 생명의 빵을 먹기 위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인격적인 단식이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은 인격적인 단식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단식도 인격적인 단식이어야 합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단식이고
사랑에 이바지하는 단식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면
그리고 사랑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면
단식은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공연한 자기 학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아직 못할지라도
사랑의 증대를 위해 그래도 어떤 식의 단식은 해야 하지 않을까,
단식치 않는 불쌍한 사람이 오늘 반성하며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