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주님의 이 말씀이 저에게는 이렇게 나뉘어 들립니다.
“너희는 명심하여라.”
“너희는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누구도 맞서가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고, 그때 주겠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는 아주 강한 힘(force)이 느껴집니다.
내가 주겠으니 너희는 뭘 하려 하지 마라!!!!
내가 제 때에 줄 테니 미리 뭘 하려 하지 마라!!!
뭐 이런 식의 강한 주님의 의지와 요구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이런 하느님을 우리가 느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것 같고,
계시더라도 졸고 계시거나 내게 무관심하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이런 우리의 느낌과 동떨어진 말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편안한 일상에서 하느님은 안 계신 분 같이 존재하십니다.
공기나 햇빛은 있을 때 느껴지지 않고
없을 때 그 존재가 느껴지는 법입니다.
살아 계실 때 우리의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늘 우리 곁에 있고 단추를 누르면 필요한 것이 나오듯
밥이나 빨래를 해주는 어머니는 필요한 때가 아니면 찾지도 않고
그래서 나갔다 들어와도 있어도 없는 듯 방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하느님도 일상에서는 없는 듯 계시기에 느껴지지 않는 분이신데
그렇다면 역경의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 곁에 늘 계시며 도와주신다는 것을 잘 느낄 수가 있습니까?
역경의 때에도 하느님은 안 계신 것 같고
내가 아무리 호소해도 안 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건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어둔 밤 가운데 있을 때
그때는 어둔 밤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눈이 밤에 익숙해질 때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어둔 밤 가운데 계시는 분이십니다.
지금은 고통 밖에 없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어둔 밤이고
우리와 함께 계셔도 고통과 절망이 하도 커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차츰 익숙해지면 같이 계신 하느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하느님은 계실 뿐 아니라 크고 강한 분으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역경 가운데 내가 꼭 너와 함께 있겠다!
그 역경이 아무리 커도 이겨낼 힘을 내가 주겠다!
그러므로 이런 하느님 체험을 하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명심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모레 위나 돌 판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겁니다.
그리고 걱정 때문에 역경의 때를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을 하고 미리 준비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때 필요한 것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마음의 준비뿐이고,
주님께서 제 때에 주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이것을 명심하는 오늘입니다.
제가 좌우명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성경말씀은 요한 복음 16, 33,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입니다.
원치 않는 풍랑 속에서 앞이 안 보일 때 마다 꺼내 쓰는 비상카드입니다.
"너의 역경 가운데 내가 꼭 너와 함께 있겠다!
그 역경이 아무리 커도 이겨낼 힘을 내가 주겠다!"
인생에서 풍랑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풍랑이 없기를 바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보다는 풍랑 속에서도 노를 젓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