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살면서 이것저것, 온갖 것을 다 겪은 걸 일컬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하고,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고도 하는데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을 다 겪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볼 꼴>이란 보면 좋을 것, 꼭 봐야할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못 볼 꼴>이란 안 보면 좋을 것,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얘기하는 거겠지요.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봐야 할 것은 못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는 사람입니다.
살아가면서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보지 말아야 하고,
자식들이 재산 때문에 서로 고소하며 싸우는 것도 보지 말아야 하며.
돈 안 준다고 부모에게 온갖 패악 질을 하는 것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것을 보고 싶어서 보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정말 이런 꼴 보고 싶지 않은데 봐야만 하니 보는 거고 그래서 불행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곧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보게 되는 불행이고, 봐야만 하는 불행입니다.
반대로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불행도 있습니다.
아직 손자를 못 봤다고 할 때 이 말은 자식이 손자를 안 보여줘서가 아니라
자식이 아직까지 아이를 못 낳아서 보고 싶은 손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지요.
아이를 낳았는데 맹인 부모는 그 사랑스런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만져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져서 보는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것이 소박한 인간의 행복이라면 신앙인의 행복이 있습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를 만져보고 더 나아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시메온이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구원자 아기 예수를 보고 그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성무일도 끝기도 때 이 찬미가를 매일 바칩니다.
노인 시메온처럼 죽을 때 이런 말을 하며 죽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을 보는 것, 아니 구원이신 주님을 보는 것,
이것이 평생소원이고, 그 평생소원이 이뤄지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이 행복이고, 이것을 보지 못하면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구원을 보고 어떻게 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것을 봤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슬기롭다는 사람과 지혜롭다는 사람은 못 보고 철부지는 본다고도 하십니다.
슬기롭다는 사람은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이고, 한 마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에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철부지들이 봅니다.
맑은 눈, 깨끗한 눈, 성령의 눈을 가져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눈을 주님께 청합니다.
본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보느냐! 이고
거기에는 자기 해석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누구를 만나 어떤 체험을 했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문득, 이런 반성을 하게 되네요.
나는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사람을 믿지 못하고 세상도 믿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왜곡된 시선을 갖게 하지는 않았는가!
오히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못 보게 하는 걸림돌은 아니었는가!
이 아침에 다시 한번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