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교회의 전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을 지내며
첫째 독서를 위해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기리는 것이 오늘의 축일이니
원죄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었고,
이 인류 조상들의 죄가 원죄가 되어 모든 인간에게 대물림되고 있는데
새 아담과 새 하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만은
여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이 축일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원죄는 아담과 하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를 그렇게 만드시고,
모든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하느님께 모든 죄의 원죄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죄와 잘못에 대해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다 자기 탓이라고 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것이지요.
부모가 그런 자식으로 낳았고 그렇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에게 곧,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
정말 하느님의 죄인 것이란 말인가요?
제 생각에 원죄는 될지언정 죄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는 뒤집어써도 죄에서는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크시기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인간이 이 자유를 가지고 당신을 거역하게도 되는 위험을 감수하시지만
인간이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자유란 이렇게 늘 죄를 지을 수 있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유란 사랑의 본질로서 사랑을 사랑답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권력가들이 힘으로 남의 여자를 뺏어 자기 아내로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사랑까지 강제로 하게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란 자유로 죄를 지은 하와와 달리
자유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인간의 원형, 새로운 하와입니다.
오늘 본기도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지
마리아의 공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며 그 이유나 목적이
성자의 합당한 거처가 되기 위해서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마리아가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부터
인간이 죄를 지을 거라는 그 가능성을 아셨고
그 죄로 인해 성자가 죽을 거라는 것까지 내다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모르고 계셨다가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야
하느님께서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부랴부랴 구원계획을 세우시고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대속하게 하기로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전부터, 아니 천지창조 때부터의 구원계획을 가지고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 어머니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지내는 축일은 사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기리는 축일이 아니라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신 하느님을 기리는 축일이며,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인 자유를 가지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와 달리
마리아처럼 자유를 가지고 주님을 잉태하고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날입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좋지만 사랑을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은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스스로 저 좋아서
하게 되는 자유이기에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학생의 진로를 선택할 때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하는가 봅니다.
그 만큼 자유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 않고 품격 있는 존재로 만드신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발로로 알아 듣게 되지만, 살다보니 자유가 주어졌다고 세상 물정 모르고
좋아할 일만도 아니라는, 자유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걸 깨닫고 부터는 좋아한다고
덮석 넘빌 일도 아니라는 걸 뒤 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에 매이지 않는 사람,
어떠한 결과가 와도 달게 받는 용기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모상성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자만이 아니라 자긍심이고 품격이 아닐까!
문득 '그리스도의 수난'에서의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인 자유를 가지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와 달리
마리아처럼 자유를 가지고 주님을 잉태하고 사랑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