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제가 양성을 받는 동안 두 가지 유형의 양성자가 있었습니다.
<안절부절> 형과 <냉담> 형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피 양성자가 수도원을 떠나려고 할 때
어떤 분은 안절부절못하는 형이고, 다른 분은 냉담한 형이라는 얘깁니다.
안절부절못하는 분의 양성을 받을 때 한 형제가 수도원을 떠나려고 하면
이 분은 안절부절못할 뿐 아니라 감정이나 심사가 날카로워지셔서
수도원 전체가 불안해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제가 교만하게도 상담자의 원칙을 들이대며
양성자로서의 자격이 있니 없니 제가 판단을 하였었습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얘기에 동감을 하면서도
내담자의 문제나 감정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지요.
그러면서 드는 예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얘기입니다.
누가 물에 빠졌을 때 당황하여 이것저것 생각지도 않고 준비도 없이
무작정 구하겠다고 물에 들어가면 웬만큼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고 매달리는 바람에 같이 빠져 죽고 마니
물에 들어가지 않고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침착하게 찾아야 한다지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기에 이 얘기대로 사랑도 지혜로워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 간에도 물리적, 심리적으로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사랑하면서도 엉켜 싸우느라 서로 지치고, 상처를 주고받지요.
그런데 그 후 다른 유형의 양성자를 경험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분도 사랑이 없고 정이 없는 것은 아닌데, 앞의 그 원칙에 충실하다보니
담담하다기보다는 냉담하고 냉정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담담한 양성자와 안절부절못하는 양성자 중 한 사람을 택하라면
담담한 양성자보다는 안절부절못하는 양성자가 낫다고 말입니다.
사랑 많은 사람이 실수를 통해 지혜를 배우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냉정한 사람이 사랑 많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찬물을 데우는 것보다 뜨거운 물을 식히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요?
아니, 뜨거운 물을 식힐 필요가 없고, 사랑을 차갑게 할 필요 없습니다.
사랑이란 본래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드는 것이고,
Control, 통제가 안 되는 것이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이 세월호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고통 앞에 중립이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맥락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을 때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고,
억눌리는 사람과 억압하는 권력이 있을 때 교회가 중립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양쪽을 다 위한다는 핑계로 자기 몸보신을 해도 물론 안 됩니다.
심지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 사회 질서를 깨는 사람일지라도
교회는 이들을 선택해야 하고 적어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착실한 양들을 놔두고
어쩌면 제멋대로 무리에서 이탈한 말썽꾸러기 양 한 마리를 찾으신다는데
이것이 아흔아홉 마리를 사랑치 않는 것이 아니고
아흔아홉 마리를 버리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착실한 양은 그대로 둬도 앞가림을 하고 이탈하지 않지만
길 잃은 양은 이미 이탈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에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사랑이라야
다른 아흔아홉 마리가 길을 잃을 때도 또 찾아 나설 겁니다.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언젠가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우리도 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