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오너라.>와 <배워라>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와서 보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와서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오라고 하시는 주님께로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대림절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이 낮은 곳까지 왔으니 이제는 네가 나에게 오너라.’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께 가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초대하시는데도 못들은 체 하는 것이거나
내 집에 오시는데 나는 다른 데로 가는 것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아직 안 오신 양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주님께로 가야 할 것이고,
사실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찾아 헤매면서
주님이 안 오셔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착하게도 초대하시는 주님께 우리가 간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오늘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휴식이 아니라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휴식이란 그저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일 뿐
하느님께로 가서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으로서의 안식은 아니지요.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배우라고 하십니다.
당신께로 와서 안식을 얻을 뿐 아니라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쉬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노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쉬는 것을 배워 잘 쉴 줄도 알아야 하고
노는 것도 배워 잘 놀 줄도 알아야 하지요.
그렇긴 하지만 제 생각에 우리가 주님께 진정 배워야 할 것은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멍에 사용법을 배우는 거라고 할 수도 있고,
십자가를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우는 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지금까지 우리는 아주 불편한 내 멍에를 매고 짐을 졌는데
이제부터 주님의 멍에를 매고 짐 지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멍에는 어떤 멍에이고 주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제 생각에 저의 멍에는 부담감이고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우리는 짐을 지기 전에 이미 마음에 엄청난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없고 짐만 있기 때문이고,
사랑이 없고 짐만 있기 때문이며,
의미는 없고 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하느님이 계시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됨으로써
짐을 지는 것이 의미가 있게 되고, 짐을 기꺼이 지게 됩니다.
대림절, 안식을 주러 오시는 주님
당신의 멍에 사용법을 가르쳐주러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깨어 기다립시다.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처럼 내가 져야 할 짐이 아닌데 내가 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짐은 부담이고 무거움으로만 다가오고 더 나아가서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기더군요.
이러한 심리적인 지옥을 숫하게 경험하다 보니,
어차피 져야 할 짐이라는 상황파악이 들면 차라리 용기를 내어 지는 편이
훨씬 마음도 편하고 스스로에게 자부심도 생기는 걸 경험으로 알아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라고 하시는 말씀의 숨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온유는 인내의 산물이라는 걸....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십자가를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대림절, 안식을 주러 오시는 주님
당신의 멍에 사용법을 가르쳐주러 오시는 주님을" 깨여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