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가르침에 권위가 있어서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기에 권위가 있었던 것일까요?
목소리가 근엄하고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고,
그 가르치심에 논리가 정연하기 때문도 아녔을 터인데
무엇이 그분의 가르침이 권위 있게 하였을까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말씀의 지당함입니다.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지당한 말씀일 때 권위가 있지요.
또 진실을 얘기할 때 권위가 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지당한 말씀이 진리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란 그 말에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얘기하지만
어떤 사실에 대한 진실은 얘기하지 않고,
특히 자기의 진실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의 진실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아무리 진리를 얘기해도 그의 말에 권위가 없습니다.
진심을 얘기하지 않을 때도 권위가 없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찾아오면 언제든 만나겠다고 했고,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반드시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얘기를 했어도 순간을 넘기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이기에 이제부터 그의 말에 권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에 권위가 있으려면
진리와 진실을 진심으로 말함으로써 그 말에 거짓이 없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면에서 완벽했기에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이 모든 면에서 주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지만
이것을 초월하는 권위, 곧 영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랐다고 얘기한 다음
이어서 더러운 영들이 주님의 말씀에 복종했다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뿐 아니라 더러운 영들에게도 권위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권위는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인간이 극단적인 수행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불가에서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부처가 된다는데
영적인 권위란 이렇게 얻을 수 있는 권위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권위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영적인 권위란 하느님과의 영적인 일치에서 오는 것,
곧 인격적인 권위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탄을 즈음하여
바티칸 성직자들의 영적인 치매에 대해서 이렇게 질타하셨다고 하지요.
“(바티칸 관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주님을 만났던 기억을 잃고,
자신이 만든 우상의 노예가 되어 오직 현재와 욕망에 매달리는
‘영적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사제들이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되고,
그래서 이웃도 도외시하고 오로지 자기의 욕망과 권력만을 쫓을 때
영적인 권위는커녕 영적인 치매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누구를 꾸짖으신다면
국민과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의 권력자들보다
주님과 만났던 기억을 잊어버리는 성직자들을 더 꾸짖으실 것입니다.
인격의 핵심은 진실성일 것입니다.
존재에서 행위가 나오기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진실하다고 여기고 그 사람의 말을 믿고 존경하게 되고
제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못 믿게거든 내가 하는 이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성숙은 인간성숙과 함께 간다고 한다면,
주제 넘게 영적 성숙을 말하기 이전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실한 인간이 되는 거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다짐하는 새 아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권위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영적인 권위란 하느님과의 영적인 일치에서 오는 것,
곧 인격적인 권위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