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얘기인데
사람들은 주님께서 오그라든 손을 펴주실지 노려보고 있습니다.
고발하기 위해서인데 그들은 주님께서 틀림없이 오그라든 손을
안식일일지라도 고쳐주실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감정은 복합적입니다.
하나는 분노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입니다.
바리사이들에 대한 주님의 이런 복합적인 감정에서
한 편으로는 두려움을, 다른 한 편으로 위안을 저는 느낍니다.
두려운 느낌은 주님께서 저도 그렇게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저도 바리사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참에 제가 바리사이와 같은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선 위선적인 면에서 저는 바리사이와 같습니다.
선을 사랑하기에 위선도 하고, 그러기에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측면도 있지만
악을 감추고 외려 선으로 포장하는 가증스러움이 주님의 분노를 살 것이고
하느님보다는 위선을 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는 저,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는 가여운 저를 보시고는 주님께서 슬프실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은 독선과 완고함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위선은 그래도 자신의 선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앞서 봤듯이 선해지려는 노력은 그래도 하게 하는데
저는 종종 위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선의 태도를 취합니다.
하느님 앞에 서면 저의 선 없음이 드러나기에
하느님 앞에 있기 보다는 저보다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는 다른 사람의 작은 악을 확대경으로 크게 비추면서
저는 선하다고, 나만 선하다고 확신범처럼 독선을 합니다.
이런 저를 주님께서는 정말 노기를 띠고 나무라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제가 주님에게서 위안을 느끼는 것은
주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독선으로 인해 완고한 상태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의 작은 악에 대해서 대단히 분노를 하면서도
그의 약함을 보게 되면 저의 약함을 보는 듯 연민과 슬픔을 느낍니다.
물론 저의 분노는 주님의 의노와는 다르지요.
주님의 분노는 하느님의 집이 장사꾼의 소굴로 바뀐 것에 분노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막는 것에 대한 의노이지요.
그에 비해 저의 분노는 거의 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의 분노입니다.
요즘은 그래도 제가 제 꼬라지를 알기에 예전보다는 덜 하지만
전에는 정말 그의 죄나 악과 상관없는
순전히 제 취향과 다른 옷차림이나 매너 때문에 화를 내기도 했지요.
심지어는 껌을 소리 내어 딱딱 씹는다고 속으로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이런 나 중심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회개를 하게 되면
그의 약함이 눈에 보이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그의 한계를 보면서
그리고 그의 약함과 한계를 저의 약함과 한계와 동일시하면서
동병상련의 애잔함과 연민을 느끼곤 합니다.
아무튼 저는 주님의 복합적인 감정에서 위안을 받으며
그렇지만 저의 분노와 슬픔이 주님의 그것과 같아지기를 비는 오늘입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모임에서 저에 대한 피드백은 주로 예리하고 날카롭다는 평이었습니다.
그런 저에 모습을 생각해 보니 상대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지적질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고 그건 저의 열등감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상대보다 나아질 수 없어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 아래로 끌어 내림으로서
반작용으로 제가 올라가는 방법을 쓰고 있는 제 모습을 보는 순간 광장에서 홀딱 벗겨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후로 듣는 피드백은 예리하고 날카롭지만
웃음이 많고 유머가 넘쳐 공동체에 활기를 준다는 피드백을 받게도 되었지만,
아직도 제버릇 개 못준다고,
오늘 신부님께서 늦잠을 주무셨다는 글을 읽으면서 넘 인간적이고 위안이 되네요.ㅎㅎㅎ
참 사람다운 사람되기 힏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도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불쌍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