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로 시작됩니다.
저는 이 말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들 둘이 있었다는데 두 아들 중에서는 누가 더 주인공일까?
왜 한 아들의 비유를 들지 않으시고 두 아들의 비유를 드셨을까?
비유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작은 아들의 얘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
사람들은 보통 작은 아들의 얘기에 비중을 더 두기에
이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작은 아들도 아니고 큰 아들도 아닙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자비로운 아버지이고,
이 비유의 주제도 그러므로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을 얘기함은 하느님은 큰 아들에게 자비로우신 것은 물론
당신을 떠났던 작은 아들에게도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 거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두 부류의 태도가 있음을 얘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큰 아들은 우리나라에서 보통의 큰 아들이 그런 것처럼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부모를 떠나지 않은 것에 도덕적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오고 그런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를 보고
시기질투를 하면서 큰 아들의 도덕적 우월감은 깨지게 됩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 곁에 머문 것이 사랑 때문에 그러한 것,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원해서 그러한 게 아님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머묾이 사랑이 아니고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큰 아들도 동생이 떠날 때 같이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동생처럼 떠나지 않은 것이 동생보다 착하다는 우월감 때문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런 자기의 착함을 인정하고 동생은 나무라시기보다는
동생이나 자기나 똑같은 아들이라고 하시고
동생이 돌아오니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고 하며 더 기뻐하시자
큰 아들은 착한 아들의 심리에서 종의 심리로 떨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착한 아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누르는 삶을 살던 것이 고착화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특히 어렸을 때는 부모의,
커서는 직장 상사나 책임자의 인정이나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이런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면의 욕구와 소망을 억누름으로써 불만이 쌓이게 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착함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존재가 흔들리고
큰 아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종의 비하감에 빠집니다.
이에 비해 작은 아들은 자기 내면의 욕구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났고 나쁜 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님을 고생을 통해 깨달았고,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참으로 행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떠난 자기는 아들이 아니라
죄인이요 품팔이꾼으로서 아버지 곁에 있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큰 아들이나 작은 아들이나 아들이라고 생각지 않고
종이나 품팔이꾼으로 낮춰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큰 아들은 비하감 때문이고 작은 아들은 겸손 때문이며
그래서 큰 아들은 비참하고 작은 아들은 행복합니다.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데 아들로 받아주시니 너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