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머물다.
열매 맺다.
아무 것도 못한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동사들인데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스스로 집을 나와 있건 쫓겨서 나와 있건 집나와 있는 사람처럼
주님 안에 머물지 않고 주님 밖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바오로 사도는 ‘알지 못하는 신’을 믿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누구나-하느님을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하느님 밖에 머문다는 것, 뒤집어 얘기하면
하느님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다 계시는 하느님이시니
존재하는 한 하느님 밖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물고기가 물 밖에 머무는 것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거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적으로 하느님 안이나 밖에 머무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거나 그렇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을 사랑하거나 그렇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보다 다른 사랑을 더 사랑하거나
하느님 사랑도 다른 사랑도 다 거부하고 오직 자기 안에 갇히기도 한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 없어도 빵만 먹으면 살 수 있고,
하느님 도움 없어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는데
주님이 유혹자 악령에게 말씀하셨듯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과
사실은 그 빵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마치 부모의 집에 살면서
부모의 사랑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주 못된 자식은 부모의 집에서 부모가 주는 것을 먹고 입고 살면서
부모의 말은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부모의 사랑은 없어도 애인의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산다.
그에게 부모의 말은 사랑이 아니라 잔소리이고,
부모의 사랑은 거추장스럽거나 부담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부모를 잃고 나서야 부모의 사랑을 알고,
아버지 집이 싫다고 집 떠난 탕자가 가진 것 다 탕진한 다음에야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아버지 집에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듯이
하느님 사랑도 잃고 나서야 하느님 사랑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가 정말로 정열을 다 쏟아 하던 것이 다 실패하고 난 뒤에야
하느님 없이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 사랑 없이 사랑하려고 했던 반역의 역사다.
하느님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을 하려고 했고,
하느님 사랑을 빼놓고 사랑을 논하려 했던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나의 사랑이 지금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돌아볼 것이다.
나의 사랑을 내 자식이 몰라줬다고 자식을 나무랄 수도 있는데
진정 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사랑 없이 사랑한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까지 일군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갔다면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운이 나빠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하거나
비겁하게 운이나 남 탓하지 않고 자기가 잘못해서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진정 영적으로 모든 일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라면
그 실패를 통하여 하느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