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지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바라시는 게 없었을 거라는 거였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버지께도 바라시는 것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더더욱 바라시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셔서 뭣을 바라시지 않고,
바라시는 것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욕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주님의 기도를 보면 4가지입니다.
-알게 되는 것.
-보게 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는 것.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듯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중충하던 날씨가 계속되다 마침 소풍가기로 한 날 해가 반짝 떠오를 때
그 햇빛과 화창한 날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데
그것이 우연이나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큰 사랑을 느끼게 됩니까?
그러니 날씨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하느님께서 주셨고,
그것도 나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얼마나 크게 느끼겠습니까?
그리고 주님뿐 아니라 나에게 주신 모든 것,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 내 친구, 내 직장 동료가 모두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들이고 사랑으로 주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사랑에 겨울 것이고 너무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도 지나고 난 뒤나 죽고 난 뒤에 아는 게 아니라 현재적으로 안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느낄 것이니 더 행복할 겁니다.
다음은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시지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아는 것은 관념적으로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알게 됨으로써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발전을 해야 되는데
알게 됨으로써 느끼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이 관상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런 행복을 일컬어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하지요.
우리에게 보내신 주님이 사랑의 표시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벅찬데
그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그 영광을 우리가 직접 보게 되면
그 벅참은 타볼 산의 베드로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사실 주님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임을 우리가 알고
그 영광을 우리가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다면 우리가 다른 것을 보거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당연히 하느님 안에 머물 것입니다.
타볼 산의 베드로처럼 여기서 텐트치고 영원히 머물겠다고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자동일 터인데
아무튼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지금 우리도 바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