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요?”
누가 가라지이고, 가라지는 누가 뽑아야 하는가?
오늘 복음을 읽으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이런 결론을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가라지는 너희 인간이 뽑을 것이 아니고
밭의 주인이신 나 하느님께서 뽑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가라지를 뽑을 수 없는 존재입니까?
이에 대해 주님은 우리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실로 우리 인간은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합니다.
저의 경험을 놓고 볼 때 구별능력이 있다고 자신할 때가 위험합니다.
없다고 겸손하고 신중할 때보다 훨씬 더 구별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 십상이고 교만할 때 더 자기중심적어서
가라지를 가라지라고 하지 않고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가라지라고 하고
그런 사람은 우리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지금 우리 행진단은 이제 겨우 하루를 같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벌써 “저 사람은 빠져야 돼!”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나보다 잘 걷지 못하고 방해만 된다고 생각하거나
공동체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제멋대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많은 경우 더 잘 걷는 사람이 볼 때는 자기도 잘 못 걷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자기도 제멋대로 하면서 남보고 제멋대로라고 하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서로를 가라지라고 하면서
서로 공동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가라지가 아닌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어디 있을까?
실로 너도나도 다 가라지입니다.
요한복음의 간음한 죄녀 얘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치고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없으며
죄 없는 주님은 살리려고 하지만 죄 많은 사람일수록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클수록 다른 사람의 죄와 악을 견디어내는데
사랑이 작으면 작을수록 남의 조그만 죄나 악도 못 견뎌합니다.
부모를 예로 들어도
사랑이 많은 어미는 자녀의 온갖 투정, 어리광, 잘못을 견디어내는데
사랑이 그만 못한 아비는 정의의 이름으로 자식을 심하게 단죄하고
자식이 당장 그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못 견뎌 하며 화를 내곤 하고,
자기 자식의 잘못은 잘 견디지만 남의 자식의 잘못은 조금도 못 견디지요.
사랑은 죄와 악을 견디어내는 힘이고,
죄와 악을 스스로 벗어나고 극복하도록 기다리는 힘이며,
죄와 악을 스스로 벗어나고 극복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18번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웃의 연약함을 보고 자기가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을 때 그 이웃이
부축해 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 이웃을 부축해 주는 사람은 복됩니다.”
여기서 부축하다는 말이 라틴어로 “Sustineo”인데
이것은 우리말로 ‘참다’, ‘견디다’, ‘기다리다’, ‘부축하다’,
‘키우다’, ‘자라게 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뿐 아니라 죄인도 우리가 오래 참고 견디고, 기다리고 부축하는
그런 사랑이 밑바탕 될 때 언젠가 반듯한 사람으로 크게 된다는 거겠지요.
오늘 우리도 걸으며 힘겨워 포기하려는 이를 서로 부축해주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