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가 원했던 삶은
복음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고 싶어했고,
그러한 원의에 대한 결과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지상 생활에서 마지막에 지녔던 모습인
오상을 그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오상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차원을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상처에 무엇인가 닿을 때마다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매 순간 고통을 잊을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힘듦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서로 닮고 싶어지고,
오랜 기간 살아온 부부에게서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처럼,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사랑했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싶었고,
그래서 십자가의 모습을 자신의 몸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오상은 고통만은 아니고,
오히려 고통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었다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사랑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의 길을 가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셨기에,
그 삶 마져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고통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내 옆에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 하심은
우리가 고통 속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고통이 우리 삶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이며,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이고,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