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추석 명절 잘 지내고 있지요?
이번 한가위 연휴가 길긴 긴데 다행히 우리는 연휴에만 젖어 있지 않을 수 있게 오늘 이렇게 중요한 축일을 맞이하고 있어요. 우리의 축제 답게,
오늘 사부님의 생애에 보다 깊이 젖어 있을 그런 하루 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상 축일. 우리 형제들에게 오상이라는 말이 낯설진 않을 겁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이 예수님 생애를 참 많이도 닮았다 하는데, 심지어 예수님의 수난 상처까지 껴 안으시고,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몸에 지닌 채 생애 말년, 2년
정도를 살게 됩니다. 그 상처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축일이 오늘이죠.
오상을 진짜 받았을까? 사실 여러 다른
이야기들이 많았겠죠. 저는 의심이라기 보다는 오상 그 자체가 지니는 각별한 의미에 더해, 오상 받은 그 순간 뿐만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의 철저한
추종자로서의 사부님의 삶 전체가 이미 오상을 입은 그런 삶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묵상이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실천한 삶을 살았던 성인, 그 성인을 모범으로 삼는 우리들. 그래서 십자가의 약함, 비참함, 낮아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이 참 프란치스칸이고 참 그리스도인이다. 엊그제 십자가 현양 축일과 더불어 오늘 이 오상 축일이 한 맥락으로 전해주는
메세지입니다
이 오상의 의미를 보다 잘 묵상할 수 있었던 기회를 저는 우리 프란치스칸이 아닌 다른
수도회 성녀의 전기를 읽다가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에디트 슈타인(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저명한 철학자였고, 교육자였고, 수녀가
되었는데, 유대인이었기에 나치에 의해 순교한 성녀입니다. 그리고 독일인 교황 베네딕도 16세에 의해 시성 되었고, 유럽의 화해를 위해 특별히
유럽의 수호 성녀로 선포되기도 한 성녀입니다.
수녀님은 자신의 수도 서원 갱신 피정 중에 이런 일기를 씁니다.
“저는 오늘 이 서원을 통해 당신의 다섯 상처를 입습니다.
제 두 손은 당신에게 못
박히어 다른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게 될 것이고(가난),
제 두 발은 당신 십자가에 함께 박히어 당신이 가라 하는 데로 걷고자 합니다(순명).
그리고 제 가슴은 당신만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상처를 받게 되겠지요(정결).”
삼대 수도 서원인 가난 순명 정결이 이 오상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안에 있다는 거에요.
프란치스코의 삶을 수도 서원안에 다 틀 지울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이 서원 안에서, 프란치스코가 따르려 했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살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상처가 프란치스코가 입은 그 오상처럼 우리에게도 새겨져 있는 것이겠죠.
오상! 거룩하고 영광스럽기만 한 상처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은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오상을 이야기 하지만, 오상을 지니고 살아야했던 그분께는 순간 순간이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서원은요? 그
서원했다는 신분 하나로도 참 많은 이들이 우릴 보고 '대단하다' '잘살라' 응원합니다. 수도복 한벌 걸쳤을 뿐인데 '수사님! 수사님!' 존중을
해 줍니다. 그런 대우를 처음 받아보는 청원 형제들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서원이 영광이기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겠다? 그것이 고통이고 희생이고 억울함이고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따르겠다는 약속이 서원입니다. 그래서 아픈 상처처럼 우리
손과 발에, 가슴에 새겨져서 우리 삶을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이 서원이지요. 십자가가, 그리고 오상이 단지 영광인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그에 따른
비참함이라는 것, 수도생활하면서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서원을 통해 우리는 고백합니다.
오늘 오상 축일을 지내면서, 장차 서원을 바라보고 있을 청원 형제들, 이미 서원생활을
하고 있는 그밖의 우리 모두가 과연 우리는 이 오상을 입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길 청하고 있는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갈망하는지 돌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