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께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당신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하신다는 것에 대해 믿는 것도 있고,
전능하심에 대해 믿는 것도 있고, 참으로 여러 가지로 믿는 것인데
오늘 독서와 연결시켜서 보면 행불행을 좌우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이사 40.6-7)
비슷한 내용이 신명기에도 있습니다.
“이제 알아라. 나 외에는 신이 없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
찌르는 것도 나요 고쳐주는 것도 나다.”(신명 32,39)
웬만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도 하지만 실은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머리로 아는 것이지 존재로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존재로 믿는 것이 아닐 때 그것은 마치
물가에 심어져야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사막에 심어진 나무와 같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예레 17,5-8)
그런데 머리로만 시냇가이고 실제로는 사막에 심어진 나무란
실제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행불행이 하느님께 있다고 하면서 사람에게서 행불행을 찾습니다.
우선 행복을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유행가 중에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마음 흐뭇해지고 따듯해져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그대>가 행복을 줄 거라고 우리가 실제로 믿는다면
행복을 줄 거라고 믿는 <그대>는 노래처럼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아니 행복을 줄 수 없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를 사랑하면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 행복을 주시지만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 있고 그래서 그를 사랑치 않으면서
그가 내게 행복을 줄 거라고 믿으면 그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줍니다.
다음으로 행불행을 하느님에게서 찾지 않는 사람은
사람에게서 불행을 찾고, 사람에게서 불행을 얻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는데 그것이 사람에게서 불행을 찾고
사람에게서 불행을 얻는 것이라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는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으면 결과적으로 불행진다는 뜻도 있지만
불행해졌을 때 ‘저놈의 인간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불행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불행의 탓을 사람에게서 돌리고
그럼으로써 사람에게서 불행을 찾고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불행을 일으키는 것이 주님 당신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이사 40.6-7)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오해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떠나면 ‘요, 괘씸한 놈, 불행해져라!’고
저주하거나 벌을 주시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기에 불행도 하느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나를 불행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행복을 찾지 않을 때
내가 불행해지는 것임을 우리는 오늘 깨달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