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와 선
오래 전, 그러니까 한 20년 정도는 되었을 겁니다.
그 시절에는 쉬는 날이면 서울에서 가깝고도 먼 산을 얼마나 많이 찾아 등산을 했었는지...!
그날은 파스칼 형제(수사)님과 둘이서 가까운 산본의 수리산을 택하였습니다.
등산이라 하기보다는 산보라고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은 낮은 산이지요.
둘이서 주거니받거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 하나를 넘어 오래된 작은 사찰인 수리사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계곡 아랫 길을 걷고 있었지요.
저희들 앞길에 어린 다람쥐 한 마리가 보이는 겁니다.
길에 나와 노는 행동이 전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순진무후의 모습이었습니다.
파스칼 형제님 왈- "어, 다람쥐 새끼가 겁도 없네! 내가 붙잡고 있을 테니, 형제, 사진을 찍어봐요."
등산을 할 때에도 늘 사진기를 메고 다니는 저였기에, 그 형제님의 생각엔 천방지축 무서움도 모르고 노는
새끼 다람쥐의 모습이 좋은 피사체의 기회라 여겼던 것이죠.
순간적으로 저는, "아니, 형제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어떻게 행동하나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어 볼래요?"
어린 다람쥐라 사람의 손에 쉽게 잡히겠지만, 그 두려움이 얼마나 클까를 지레 염려한 것이지요.
그렇게 둘은 가던 길을 멈추고, 새끼 다람쥐의 동태를 일거일동 지켜보았습니다.
그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어미 다람쥐가 나타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람을 피해 영역을 벗어나야 하는데, 새끼는 전혀 낌새도 알아채리지 못하고 마냥 사람 앞에서
제 할 일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어미의 애간장이 오죽 했겠습니까.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얼마쯤 흘러가자, 어미 다람쥐의 태도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저희 사람이 새끼를 해칠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이 어미의 마음에 서서히 자리한 것이지요.
이제는 새끼와 어미와의 동태가 재미있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미가 새끼의 정수리 부분을 톡톡톡 가볍게 쪼아대며 앞장을 서는 거겠죠.
그렇게 길섶 나무에 오르내리는 학습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새끼가 딴청을 부리면 어미는 다시 되돌아와 주둥이로 새끼의 머리에 톡톡톡 싸인을 하는 거죠.
그렇게 다람쥐 세계의 학습 과정에 열중한 결과,
아하! 다람쥐 세계에서도 그냥 저절로 살아지는 게 아니라 자라면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믿음이나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고,
자못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간 존재의 내면이 참으로 잘못되어 있어, 자칫 자연에 대한 파괴의
주범일 수 있다는...경각심을 배운 좋은 체험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람쥐 엄마와 새끼의 훈훈한 학습 현장을 뒤로하면서
마음으로, "안녕, 다람쥐야, 건강하게 잘 지내렴!", 작별을 고하고 가던 산길을 재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