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와 선
뉘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서울'이라 하면 말씨가 느려선지, '충청도' 사람같은데요 하는 분들이 많다. 하기사 흑석동 넘어 '동작동(동재기)'이었으니, 내 어린시절엔 모든 게 시골 정황과 진배없었다. 초교 1학년 땐가, 비로소 뻐스 종점이 현 현충원 정문 건너편에 생겼을 정도니까. 그리고 마을 맨 꼭대기에 자리한 우리 집이었기에, 대문 밖에만 나가면 산이요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여 가끔 강과 넓은 백사장 건너에 기적 소리를 내며 휘돌아 가는 기차가 아스라히 보였으니, 거기가 동부 이촌동쯤 되는 지역이었으리. 우리 집 바로 아래로는 밭과 논들이 있어 겨울 이맘때면 늘 아이들이 썰매 지치기와 팽이치기 그리고 집 가까이 낮은 동산에 올라 연날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기사 당시의 서울 인구가 천만이 넘는 오늘의 대도시에 비해 전차가 오다니는 불과 수십만 밖에 안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 시골스런 환경 덕택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감사한지! 수도원에 입회(1974년도)한 이후로도 잛았던 성심원의 삶과 6년간의 성거산 생활 외에는 거개(약 35년?)가 서울 생활이었다. 그치만 나의 내면 바탕과 정서엔 언제나 시골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시골에서 지내면 좋은 것들이 참으로 많다. 우선 공기가 맑고 별과 산 그리고 나무, 흙, 풀,...같은 것들을 훨씬 가까이 대할 수 있으며, 사람이 적은 그런 환경이야말로 쉽게 친구가 된다. 수많은 아파트하며 자동차의 소음, 휘황찬란한 불빛하며 흙을 대하기 어려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시설물들의 거대 도시에 견주어 보면, 내 어린 시절엔 눈만 뜨면 해와 달, 흐르는 실개천과 물고기, 가재와 게, 산새, 들꽃, 풀벌레, 바람, 바람, 구름,...들과 벗이 되어, 때로는 그들이 아주 훌륭한 선생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잠자리와 같은 많은 곤충들과 집 처마마다에 둥지를 튼 제비들을 흔히 볼 수 있었던 마을! 세월의 뒤안길, 현충원의 등장으로 사라져 버린 동재기의 위말과 아랫말, 농배와 건너말...게다가 강변 동재기 나루터에 늘 정착해 있던 나룻배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꼬!
현재에 눈여겨 보니, 우리 동네 보리밭 옆을 지나쳐 갯말(배나무골이라고도 했음))과 농배란 동네로 넘어가는 사잇길이 있었다. 바로 동네 형아들이 우면산으로 가재를 잡으러 갔을 때 몰래 뒤쫒아 넘나들던 그 길...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으니까, 정검말을 지나 사당 쪽으로 넓은 신작로가 길게 뻗은 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으니, 그 멀고 먼 길을 따라나선 꼬맹이의 발걸음이 오죽했을까. 걷다가 서리한 참외와 무가 잔뜩 죄스런 어린 맘이었어도 그 맛이 참으로 꿀맛! 다리가 하도 아파 중간에 손을 들어 지나가는 우마차를 빌려타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청정한 대자연
자치기와 땅따먹기...등 아해들의 단순한 놀이
땡벌에 쏘이면서도 꿀맛이던 멍석딸기.
메뚜기나 방개 한 마리에도 신기해 하며
주둥이가 새까맣토록 뽑아 10월의 먹은 콩밭 서리.
스치는 풀 한포기나 바람결,...
풀벌레 소리 하나에서도 예사롭지 않았던 무수한 배움들.
그렇게 소박한 어린시절이 있었기에, 복잡한 서울 중심에 살면서도 조용히 내면을 깨우는 지금의 삶이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도심지 틈바구니 속에서도 잘 침잠할 수 있는 삶. 작은 정원과 함께 늘 내 자신의 내면을 빗자루질 할 수 있는 조용한 삶. 좀 더 좋고도 많은 것,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상과는 달리 욕심없이 맘 편한 삶. 아마도 옛적 아이스런 바탕이 있어 가능한 복들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하느님 은총이 아니고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