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빌며...
혼자 잘 놀 줄 아는 사람은 외로울 새가 없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
평생 결혼 생활을 하며 배우자가 곁에 있어도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외로움을 토로하는 부부들을 자주 보아 온다.
25-30여명이 함께 사는 이곳 수도 공동체에서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형제가 있는 가 하면, 내 경우엔 거의 그럴 일이 없다. 어느 누군가 함께 시간을 보내면 그 또한 즐겁지만 혼자서도 별로 적적하지 않은 것이...개별적인 관심이 없어도 공동체라는 든든함이 늘 존재해 있고, 내 경우엔 어느 형제의 잔잔한 관심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 독서나 모든 주변의 사물, 특히 자연의 많은 사물들에 관심을 두고 있어 외로울 새가 없다. 또한 기도를 통해 생각해드려야 할 분들이 주변에 적지않으니, 턱을 바치고 남이 나에게 관심써 주기를 바라는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또 까마득한 지난 날이나 오늘이나 심심할 새가 없는 내 자신임을 생각 할 때, 본디 그런 존재요...어쩌면 내 죽는 날이 최고 좋은 날일 수 밖에 없으려니, 하느님께 달아드는 그 날보다 더 좋은 날이 또 있을까 보냐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혹자는 징글징글한 과거지사여서 잊혀져야할 것으로 치부해버리지만, 내 경우엔 설혹 좋지않고 힘든 일이 있었을지라도 그런 것들보다 아름답고 고마운 추억들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편이다.
지난 토요일만 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적인 일을 하면서 짬을 내어 언제나처럼 훌쩍 동작역(지하철로 30분 거리)으로 향했다. 흔히들 "맨날 가는 그곳에 무에 볼 게 있어 그리 자주 가느냐?" 하지만, 그곳엘 가면 우선 나무가 많고 걷기가 좋으니까. 게다가 맘 먹은대로 다양한 코스를 택하여 걸으니 지루할 새가 없다. 그리고 늘 보아 온 같은 장소, 똑같아 보이는 정경이라도 내 시각과 마음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고 자연에 대한 신선함을 느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우선 그곳엘 들어서면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 들어온다. 예없던 4호선 '동작역사' 자리로, 흘러져 내려 온 공작봉의 산등성이가 한강에 맞닿은 끝자락에 세워졌고, 동물의 꼬리같았던 산줄기의 끝자락이 잘려져 '갯말'로 넘어가는 지하철 터널이 뚫려 있는 것이다. 그 입구쯤엔 넘어가는 신작로 언덕길이 나 있어, 겨울 이맘때면 자동차가 안다니던 시절이라 아이들의 신나는 썰매장이었다.
아마도 예닐곱살 때였으리라. 우리 집 뒷 산 바로 내 곁에서 갑짜기 놀래어 푸드득 나르는 꿩을 보았다. 그런데 꿩이 어디 멀리 나르는 동물인가...지척에 내려앉아 어린 내게 금방이라도 잡힐것만 같아 꿩이 앉은 자리로 쫒아갔다. 그렇게 집요하게 쫒고 쫒기길 반복, 어느덧 먼 거리인 한강 가까운 산등성이 끝자락까지 꿩을 잡으려 내달렸다. 그런데 어디 꿩이 어린아이에게 잡힐 존재인가, 결국엔 허탈함을 안고 그제서야 집에서 너무 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무서움이 엄습하기 시작, 아무도 보이지않는 낱선 동네로부터 집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꿩을 잡으려다 그렇듯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지금도 동작역 근처엘 가면, 그때의 내 자화상이 아련히 떠올라 미소짓는다.
어릴적 추억이 많이 서린 현충원의 전체 지형 중원으로 흐르고 있는 개천은, 현재로선 양 가로는 축대가 잘 쌓여졌고 중간중간 원형 의자가 마련되어 쉬기에 좋은 공간으로 형성되었지만, 자연 그대로였던 예전의 모습이 떠올라 마치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뛰어 나올 것만 같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우뚝 지켜보아 왔을 냇가의 한 그루 거목(미루나무)은 예나 지금이나 미소를 뛰며 반기는 양 지긋이 내려다 보고 있다. 그 나무 끝자락을 올려다보노라면, 파아란 하늘처럼 시린 눈망울에 푸른 물감이 번질 것만 같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주일인 그제 올라 본 인왕산 자락 길엔 연이은 추위에도 양지바른 곳마다 파릇파릇 풀잎이 돗아나 있고 봄꽂 가지마다에 꽃망울이 제법 크게 부풀어 올라 있으니, 하느님 손길인 이 자연의 작품곁을 어이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 경이로운 손짓에 한참을 서성일 수 밖에...
그렇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하느님께 감사할 매일 좋은 날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