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축일은 하느님 편에서 보면 통보 축일이고,
마리아 편에서 보면 수락 축일인데
무엇을 하느님은 통보하신 것이고 마리아는 무엇을 수락한 것입니까?
하나마나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통보하신 것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수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것이고
당신 아들을 보내니 수태하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보내며
내 자녀로 키워 달라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종종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닥칠 때
누가 나보고 그것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지만
그게 과연 하느님 뜻인지 긴가민가하여 고민케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렇듯 늘
수락의 어려움과 식별의 어려움이 있고
마리아의 잉태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진주의 생성과정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지요.
진주는 조개가 생성하는 것인데
진주는 이물질이 조개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생성이 시작됩니다.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온다는 것은 눈에 티가 들어오는 것처럼 아프고
이물질이 날카로운 것이면 조개에 상처를 입혀 조개를 썩게도 합니다.
그럼에도 진주를 생성하려면 이물질이 들어오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물질이 상처 주지 못하도록 이 이물질을 감쌀 물질을 분비해야 하는데
이 락카라는 물질을 분비할 때 동반하는 통증도 감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많은 경우 수락은 수난입니다.
그리고 수락이란 이런 것이기에 쉽지가 않은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 그나마 쉬운데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이, 사랑이신 하느님이
이러실 리 없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임을 확신한다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진위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지만
이 고통을 주심도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이란 고통에서 사랑을 읽어내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이고,
주님의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받았기에
수락도 식별도 별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기 쉬운데
믿음의 은총을 받은 것이지 고통이 없는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님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만 하고 이런 수락을 우리는 본받아야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는 고백은
"고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능력"을 자라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