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오늘 이사야서는 참으로 희망찬 세상을 제시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그래서 예루살렘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게 하고
예루살렘 안에서 다시는 울음과 울부짖음이 없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아닌 것 같고
죽고 난 뒤의 저 세상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꿈같은 얘기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세상은 정말 꿈같은 얘기고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겁니까?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은 기쁨과 즐거움이 자기중심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겠다고 하지 않고
기쁜 일, 즐거운 일이 내게 있기를 바라고,
누가 나에게 기쁨이 되어주고 나를 즐겁게 해 주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보통은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랑을 할 경우에는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고,
너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되기도 하잖습니까?
저도 아주 가끔 형제들을 위해 밥하는 것을 자청하곤 합니다.
평소에 제가 너무 차갑고 가까이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주기에
저도 따듯한 면이 있다는 것을 표하기 위해서도 하고
집을 많이 비워 미안한 마음에 가끔 사랑을 표하기 위해서도 하는데
음식 솜씨가 없으니 맛이 있을 리 하나도 없지만
형제들이 사랑으로 맛있게 먹어주면 그것이 그렇게 저의 기쁨이 됩니다.
물론 그렇게 사랑으로 했는데 맛있게 먹어주지 않으면
서운함으로 바뀌는 미성숙한 사랑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래도
사랑으로 하였기에 형제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저의 기쁨과 즐거움인 겁니다.
그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문제가 아니지요.
천당과 지옥이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이 있고 없고의 문제이듯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상을 파괴하고 새 창조를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새로운 존재,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의 존재에서 사랑의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는 이어서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노래하지요.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이어지는 이 말씀도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곧 죽어 천국에 가면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을 거라고
우리가 장례미사에서 자주 듣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천국이 이런 곳이고, 이런 곳이어야 하지만
꼭 죽고 난 뒤의 천국만이 이런 곳이어서는 안 되고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도 이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새로워진 존재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을 피눈물 나게 하고 울부짖게 하는 짓도 아니 하겠지요.
그러므로 나의 기쁨과 즐거움만 찾는 이기주의적인 사람에서
내가 남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이 사순절에 우리가 해야 할 회개이고
이것이 이 사순절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새 세상을 만드시는 방법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