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이 되면, 그것도 사순 4주간이 되면 괴롭습니다.
그게 그거 같은 요한복음의 잔소리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장황하게 이 말씀 저 말씀 하시는데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시고,
아버지께서 살리시니 당신도 살리신다는 대략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대로 당신도 하신다는 말씀,
아버지께서 하시는 대로 당신도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말씀,
이것이 실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고픈
그 많은 말의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제가 크면서 많이 들은 얘기이고 실제로 그런 것을 많이 봤는데
그것은 아비 하는 대로 자식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비가 바람을 많이 피워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하고
그래서 자기는 커서 절대로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미를 자주 때리는 애비를 보고 자기는 안 그러겠다고 했는데
그 자식이 커서는 애비 하는 짓을 똑같이 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애비도 자기처럼 하라고 하지 않았고
자식도 애비처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똑같이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는 DNA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이 크게 이 두 가지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타고난 것과 보고 배운 것.
체질이나 성격 등은 타고난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체질이나 성격, 습관이나 재능은 아버지 닮은 것이 많은데
제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도 닮았다면
이런 것들은 후천적인 것, 곧 보고 배운 게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렇지만 타고난 것, 받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문제는 후천적이고,
그래서 내가 무엇을 보고 배우고, 어떻게 노력했느냐에 달렸지요.
체질이나 성격이나 재능은 타고 났어도 인품이나 성품은 하기 나름이고
특히 사랑하고 안 하고는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는 사랑의 사람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사랑과 거리가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체질, 성격, 재능에 따라 잘 하는 것이나 못하는 것이 있고,
그래서 하는 일이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어도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사랑으로 하느냐 미움으로 하느냐,
살리는 일을 하느냐 죽이는 일을 하느냐는 선천적이지 않고
내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잔인한 짓을 많이 보고 자란 사람, 나쁜 일에 자주 가담한 사람은
눈 깜짝 하지 않고 잔인한 짓을 하거나 죽이는 것을 쉽게 하고,
부모의 헌신적인 이웃 사랑을 늘 보고 자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까지 정성껏 볼보는 가족분위기 안에서 자란 사람은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조차 너무 괴로워하지요.
그러니 인간적으로도 이웃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뭘 보고 자랐느냐가 이렇게 중요한데
신앙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처럼 늘 하느님을 보며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다른 말로 하면 관상이고, 관상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주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