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부활 대축일 낮 미사를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매 주 근처 본당 미사를 봉헌하기에
형제들과 주일 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형제들과 미사를 봉헌하였고,
그것도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주례하는 형제의 인도에 따라
우리는 특별한 감사송을 바쳤습니다.
한 형제, 한 형제 돌아가며 짧게 감사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저의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저도 모르게
“거듭거듭 깨달을 수 있도록 無知를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세상사적으로 보면 無知는 감사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신비의 세계에서 무지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순간,
아니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 앞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앎으로 파악된 하느님은 하느님 맨 끝 자락이고
그렇게 만난 하느님을 하느님이라고 하는 순간
하느님은 당신을 다른 모습으로 숨기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다 알려고 하고
하느님처럼 되려 한 순간,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
그래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다 알지 못함을 아는 순간,
신비스러운 하느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가 만났고,
사랑했고
그리고 잘 알고 있는 주님을 잃고 찾아 헤맵니다.
주님을 잃어버림,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
새로운 주님과 재회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과거 내가 알고 만난 주님은 주님의 낡은 한 자락이기에
부활하신 새로운 주님을 만나려면
과거의 주님은 시체처럼 잃어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형상으로 새로운 주님을 만나려고 하면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주님을 뵙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잃어버린 마리아는 웁니다.
그러나 울음은 잃는 자의 특권이고
새로운 찾음과 갈망의 씨앗입니다.
남정네들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울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것만 확인하고는 돌아갑니다.
울지도 않고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우는 한 재회할 수 있습니다.
찾아 나서고
낯선 천사에게도 묻습니다.
새로운 찾음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주님도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낯설고
그래서 알 수 없고,
만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한
“마리아!”하고 한 번 부르심으로 즉각 알아채고
주님을 만나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주님께서 만지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지만
드디어 주님을 만나 뵙고, 알아 뵙니다.
그리고 가서 제자들에게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전합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가 되어 부활하신 새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매 주 근처 본당 미사를 봉헌하기에
형제들과 주일 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형제들과 미사를 봉헌하였고,
그것도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주례하는 형제의 인도에 따라
우리는 특별한 감사송을 바쳤습니다.
한 형제, 한 형제 돌아가며 짧게 감사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저의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저도 모르게
“거듭거듭 깨달을 수 있도록 無知를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세상사적으로 보면 無知는 감사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신비의 세계에서 무지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순간,
아니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 앞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앎으로 파악된 하느님은 하느님 맨 끝 자락이고
그렇게 만난 하느님을 하느님이라고 하는 순간
하느님은 당신을 다른 모습으로 숨기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다 알려고 하고
하느님처럼 되려 한 순간,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
그래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다 알지 못함을 아는 순간,
신비스러운 하느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가 만났고,
사랑했고
그리고 잘 알고 있는 주님을 잃고 찾아 헤맵니다.
주님을 잃어버림,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
새로운 주님과 재회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과거 내가 알고 만난 주님은 주님의 낡은 한 자락이기에
부활하신 새로운 주님을 만나려면
과거의 주님은 시체처럼 잃어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형상으로 새로운 주님을 만나려고 하면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주님을 뵙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잃어버린 마리아는 웁니다.
그러나 울음은 잃는 자의 특권이고
새로운 찾음과 갈망의 씨앗입니다.
남정네들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울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것만 확인하고는 돌아갑니다.
울지도 않고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우는 한 재회할 수 있습니다.
찾아 나서고
낯선 천사에게도 묻습니다.
새로운 찾음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주님도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낯설고
그래서 알 수 없고,
만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한
“마리아!”하고 한 번 부르심으로 즉각 알아채고
주님을 만나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주님께서 만지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지만
드디어 주님을 만나 뵙고, 알아 뵙니다.
그리고 가서 제자들에게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전합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가 되어 부활하신 새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 분과 함께 호흡할수 있느냐??? 이게 포인트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쇠님 말씀대로 나의 의지로 알려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분께 내어 맡겨드리며
만나뵙고자 하는 마음을 제 가슴속에 품어야 할 듯 싶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곳을 불문하고 존재함을 그 위대한 진리를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모든 형제들이여 부활축하드립니다. ^_______^
이 말씀 감사드림니다.
작은 일이라도 큰 사랑으로 실천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겠습니다!!!!
사랑은 사방에 있습니다.
Love is everywhere.!!! God is everywhere.!!!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또 새로운 주님을 만났으리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