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어떤 제자들입니까?
제자이니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고,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던 제자들이며,
그러나 지금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주님을 따랐고,
왜 예루살렘으로 갔으며 지금은 왜 엠마오로 가는가요?
믿지 않는 사람이 자기인생의 전부를 걸고 따르지는 않을 테니
주님을 따른 것은 그들은 주님을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주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던 걸까요?
엠마오로 돌아가며 이들이 한 말에 그들의 믿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
그러니까 행동과 말씀에 정말로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힘까지 있는 예언자라 생각되었기에
따랐는데 그런데 그분이 그만 그렇게 아무 힘없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는데 그분이 그렇게 힘이 없는지 그들은 몰랐던 거고
그래서 그들은 스승이 돌아가시자
승리와 해방의 장소로 생각했던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뭡니까? 엠마오가 그들의 고향이라면 귀향이 아니라 낙향이고
고향이 아니라면 무조건 예루살렘을 떠나 가다보니 간 곳이 엠마오겠지요.
아무튼 이 얼마나 분하고, 허무하고, 비참하고, 처량한 패배자의 길입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패배자의 길을 가던 이런 제자들을 다시 돌려세웁니다.
어떻게 이들을 돌아서게 하고 가슴에 불이 타오르게 하신 걸까요?
물론 돌아가셨던 주님이 살아나셨기 때문인데
살아났다는 여인들의 말에도 믿지 않던 이들이 어떻게 믿게 된 걸까요?
이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예언서를 풀이해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사실 부활을 믿게 되면 불이 활활 타오르게 되지요.
순교자들이 그렇게 뜨거울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자들의 부활증언을 믿지 못하던 그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인해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선 말씀(예언서 풀이)으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설득하신 겁니다.
그리스도란 고난을 받아야지만 된다는 것, 그래야지만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신 겁니다.
이 풀이를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나중에 이렇게 자기들끼리 얘기합니다.
“길에서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주실 때 우리마음이 타오지 않았던가?”
다음으로 행동으로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식탁에서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이들은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게 되는데
빵을 축복하고 나눠주심이 바로 최후만찬의 재현임을 깨닫게 한 것이고
그래서 결정적으로 이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허나 그 이전에 뭔가 끌리는 것이 있었기에 같이 묵자고 잡아끌었던 겁니다.
바로 주님의 <동행>과 <동감>이 제자들을 <감동>하게 한 것입니다.
동행해주시고 동감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이 어이 이리 굼뜨냐?”고
했던 제자들의 그 굼뜬 마음을 감동케 한, 다시 말해서 움직이게 한 겁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사랑입니다.
말이건 행동이건 그것이 사랑이일 때 마음이 움직이고,
그 사랑이 진실하고 겸손할 때 마음이 움직이며,
무엇보다도 그 사랑이 성령의 사랑일 때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