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제자들이
주님이 깨우쳐주심으로 알아보게 됨을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이 얘기들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함께 걸으시고
빵을 나누시고
같이 얘기를 나누시는데도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고
한탄하시듯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로 하여금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굼뜨고 닫힌 마음이고 어떤 편견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거룩한 곳, 성전에만 계시고
주님은 긴 머리를 하고 계시고
주님은 무엇을 잡수지도 않고
주님은 화장실에도 안 가시는 분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영원한 “지금, 여기(Here and Now)"이십니다.
우리가 빵을 나눌 때 거기에 계시고,
우리가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카바레에서 춤을 출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바닷가 횟집에서 회를 안주로 술을 마실 때에도
오늘 제자들과 생선 한 토막 같이 잡수듯 거기 계십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이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셨습니다.
평소 금슬이 좋았던 분이기에
그 슬픔이 얼마나 클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매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늘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남편이 회사 가거나,
특히 출장을 가면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늘 자기와 함께 함께 있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이상 살아계실 때의 모습도 아니십니다.
그래서 생전의 모습을 생각하는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모습으로,
이 봄 피어나는 꽃들의 모습으로
심지어 바위의 모습, 구더기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구더기에서 구더기이신 예수님을 보았고
바위에서 바위이신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사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려면
우리도 열린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듯
우리의 마음과 눈도 열어주시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제자들이
주님이 깨우쳐주심으로 알아보게 됨을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이 얘기들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함께 걸으시고
빵을 나누시고
같이 얘기를 나누시는데도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고
한탄하시듯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로 하여금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굼뜨고 닫힌 마음이고 어떤 편견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거룩한 곳, 성전에만 계시고
주님은 긴 머리를 하고 계시고
주님은 무엇을 잡수지도 않고
주님은 화장실에도 안 가시는 분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영원한 “지금, 여기(Here and Now)"이십니다.
우리가 빵을 나눌 때 거기에 계시고,
우리가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카바레에서 춤을 출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바닷가 횟집에서 회를 안주로 술을 마실 때에도
오늘 제자들과 생선 한 토막 같이 잡수듯 거기 계십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이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셨습니다.
평소 금슬이 좋았던 분이기에
그 슬픔이 얼마나 클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매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늘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남편이 회사 가거나,
특히 출장을 가면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늘 자기와 함께 함께 있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이상 살아계실 때의 모습도 아니십니다.
그래서 생전의 모습을 생각하는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모습으로,
이 봄 피어나는 꽃들의 모습으로
심지어 바위의 모습, 구더기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구더기에서 구더기이신 예수님을 보았고
바위에서 바위이신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사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려면
우리도 열린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듯
우리의 마음과 눈도 열어주시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에서... 춤으로 표현되는 열정의 카바레 자매님의 모습에서도...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손 굳게 잡고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어떤 두려움도 너끈히 이겨내리이다..
사방에 부활하신 주님이 계심니다.
그래서 마음이 든든함니다.
God in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