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에게 몰려들자 이것을 본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고 바오로 사도를 모독하고 반박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기란 무엇이고,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왜 생길까?
시기란 기쁨과 즐거움처럼 보통 질투와 같이 쓰지만
차이점도 있는 말이며 남이 잘 되는 것을 원치 않고
그래서 남이 잘 될 때 싫고 괴로운 감정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바로 이 감정이요 고통이지요.
이에 비해 질투는 누가 나보다 더 사랑을 받는 것을 원치 않고
그래서 남이 나보다 더 사랑을 받으면 싫고 괴로운 감정이지요.
예를 들어 여고생 때 선생님의 사랑을 친구가 더 많이 받으면
선생님의 사랑을 놓고 친구를 질투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질투건 시기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왜 생깁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내 안에 사랑 대신 경쟁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면
질투의 감정이나 마음이 생기지 않지만 나와 경쟁자인 친구가
내가 사랑받고 싶은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때 생기는 거지요.
시기도 경쟁자가 성공을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명절이 되면 친척이 모여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데
누구네 아들이 크게 아프면 모두 같이 아파하고 걱정하지만
만일 나의 아들은 놀고 있는데 누구네 아들은 좋은 회사에 취직하거나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흔쾌히 축하해주지 못하고 속이 쓰리는 법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내 안에 왜 사랑 대신 경쟁심이 생깁니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랑이 없기 때문에 경쟁심이 생기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지금의 나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남을 보게 되는 것이며
남보다 더 사랑받거나 성공을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빈곤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잖아요?
지금의 나는 옛날과 비교하면 충분히 만족하고 남을 정도로 부유한데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빈곤을 느끼고 불만이지요.
그러므로 지금의 나에 대해 만족하고 지금의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빼놓고 인간적으로 경쟁치 않을 수 있는 비결이고,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인데
그러나 영적으로는 우리가 다르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사랑을 놓고도 시기질투하고,
그래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서는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도 시기질투를 하곤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육의 영으로 차 있으면
혹, 이 세상 재물과 성공을 가지고는 경쟁치 않아도
성령의 사랑과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경쟁을 합니다.
더 고차원적이고 탐욕적인 경쟁이요 시기질투지요.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안에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하고,
권고에서도 영적인 시기를 하지 말라고 이렇게 권고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시기하고 바오로를 모독하고 반박하지만
프란치스코에 따르면 실은 하느님을 시기하고 모독하고 반박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