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종종 드라마틱하다고 하거나 아주 극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떤 드라마가 막장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을 시청자를 끌기 위해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인간이 쓰는 드라마라고 한다면
오늘 탈출기의 얘기는 하느님이 쓰는 드라마입니다.
죽게 된 갓난아이 모세가 살아나게 되는 이야기가 아주 극적이지 않습니까?
이집트 왕에 의해서 죽게 되어있는 모세가 이집트 공주에 의해 살게 되고,
모세의 엄마는 유모로 제 자식을 키울 수 있게 된 것도 얼마나 극적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집트 왕실의 일원이 된 것도 극적인데
이런 모세가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는 것은 또 얼마나 극적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극적인 것이 아니라 기적인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에 의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극적이지만
하느님 섭리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면 이것은 기적인 거지요.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의 이스라엘 역사가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에 의한 기적의 역사요 구원사인 것처럼
모세의 탈출기 역사 또한 하느님의 거대한 구원의 역사이지요.
이 구원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도구로 등장합니다.
아니 모든 이가 사실은 다 구원역사의 일원이며 도구입니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에서 주인공은 하느님이고,
모세도 파라오도, 공주도 공주의 하녀들도, 그리고 모두가
다 자기가 맡은 크고 작은 역할을 수행한 구원의 도구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영도한 사람으로서 큰 도구였지만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고 내쫓음으로써
모세 못지않게 구원의 역사에 기여한 것이 큰 도구였습니다.
저도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인민을 돕는 북한 일을 할 때, 곧 평양에 종합복지관을 세울 때
소위 빨갱이들이 너무도 애를 먹였고 여러 번 좌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빨갱이들과 만나고 오면 고백성사꺼리가 많았지요.
그런데 마지막 타협이 어그러지고 완전히 끝장이 나게 되었을 때
그렇게만 생각했던 그 빨갱이가 좋은 타협책/해결책을 제시해왔고
그로 인해 평양의 종합 복지관은 축복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북한일 할 때 여러 기적적인 체험들이 저의 신앙의 폭을 넓혀주었는데
그 체험 또한 저의 믿음을 한 단계 올라서게 하고 넓혀주었으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위해 저뿐 아니라
빨갱이도 도구로 쓰신다는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묵상을 할 수 있겠습니다.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자기 민족처럼 잘 대해주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면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지도 가나안을 향해가지도 않았겠지요?
탈출기, 그러니까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것을
영성적으로 얘기할 때 이집트는 죄와 억압의 이 세상을 유비하고,
가나안은 생명과 자유의 하느님 나라를 유비하는 거라고 하는데
이 세상사는 것이 마냥 행복하다면 우리도 부자 청년처럼
주님을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 세상의 역경과 곤란이 사실은 모세보다도
이 세상을 더 잘 탈출케 하는 영도자입니다.
이렇게 고마운 내 인생, 내 주변의 파라오는 누굴까?
한 번 돌아보고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