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오늘 탈출기 얘기는 모세가 하느님 체험을 하는 얘깁니다.
모세가 앞서 한 행위, 곧 이집트인을 죽이고 동족을 구한 행위는
하느님 체험을 하기 전에 그저 인간적인 동족애에 불과한 것이고,
김구 선생이 일제순경을 죽이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과 같은 겁니다.
저는 전부터 김구 선생보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관심이 더 많았는데
특히 작년에 대련 뤼순 감옥을 보고나서는 더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팔이 안으로 굽듯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여서가 아니라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 이상의 예언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진정 훌륭한 신앙인이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소명을 하느님께 받았다고 생각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대건 신부님과 중국 공산화 후 중국에 남으셨던 3분 신부님
발자취를 따르는 순례를 할 때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도 순례할 계획입니다.
아무튼 오늘 떨기나무의 기적을 통해 하느님 현존체험을 하기 전에는
모세도 민족적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이었는데
오늘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현존체험과 소명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현존체험과 자기의 소명체험은 동시에 오는 것인데
그것은 모세뿐 아니라 하느님을 체험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 체험과 부르심에 따라 소명이 달라지는 것일 뿐이죠.
그러면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현존을 체험케 한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 말입니다.
그것은 알 수 없음이고, 신앙적으로는 신비神秘입니다.
떨기나무가 불타고 있는데도 어찌, 왜 타버리지 않는지 알 수 없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현상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그래서 우리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때
그 일은 우리에게 신비이고, 그 신비를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우리는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누가 하느님을 보게 되는가에 대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영역이 더 많음을 알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을 봅니다.
더 나아가 나뿐 아니라 인간이란 누구나 모르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모르는 영역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아레오파고 광장에서
아테네인들에게 얘기한 그 “모르는 신”임을 아는 사람이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듯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은 하느님을 못 보지요.
그런데 실은 알고 있는 것만 아는 것이지 다른 것은 모르는데
자기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에 안다고 하는 것이지요.
나이를 먹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는 모르는 것 때문에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점점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 때문에 부끄럽고,
더 부끄러운 것은 그러면서도 안다고 말이 많은 것입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데 왜 타 없어져버리지 않는지
모세는 자기가 가서 그것을 봐야겠다고 하는데 비해
나는 모르면서도 신기해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